[김정호의 劍과 길] 제3회: 스페인 카세레스에 체육단지를 세운 예산 청년김영구 대사범 · 전국체전 3연패에서 유럽 개척자로
1979년 여름, 카세레스(Cáceres). 에스트레마두라 고원의 햇살이 돌바닥을 달구는 오후였다. 스물여섯의 청년이 광장 한복판에서 발을 들어 올렸다. 멈춰 선 행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카라테?" 청년은 땀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오. 태권도."
충청남도 예산에서 온 그 청년의 이름은 김영구(金永求). 전국체전 태권도 핀급 3연패의 챔피언이었고, 이태원에서 조직 두목의 치아를 여덟 개 부러뜨린 사람이었다. 그는 이 낯선 이베리아반도의 도시에서 가라데의 속국 취급을 받던 태권도를 독립시키고, 훗날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이끄는 역사적 흐름에 씨앗 하나를 심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김영구 대사범은 예산중학교 17회다. 이 연재의 구술자인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는 예산중학교 20회다. 세 기수 차이. 충남 예산이라는 같은 고장에서 같은 교정을 밟은 선배와 후배다.
무예계에서는 사범과 제자, 관장과 수련생의 계보가 인연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래된 인연이 있다. 어릴 때 같은 강을 건넌 사람들, 같은 고장 흙냄새를 맡고 자란 사람들의 연결은 기술이나 단증보다 더 깊이 사람을 묶는다. 김정호 총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김영구 대사범의 이야기를 꺼낼 때 목소리가 달라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예산중학교 선배님이세요. 내가 3년 후배입니다. 그 선배가 스페인에 체육단지를 세웠어요. 예산에서 나온 사람이."
1973년 이소룡이 죽었다. 그가 남긴 네 편의 영화는 전 세계를 동양 무예의 열풍으로 달궜다. 그러나 그 열풍은 한국 무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았다. 가라데·유도·쿵푸는 이미 유럽과 미주 전역에 제도적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스페인에 진출한 한국 태권도는 '가라데의 한 분파'로 분류됐다. 스페인 체육부는 독립 인가를 내주지 않았고, 사범들은 가라데 자격증을 통해야 도장 문을 열 수 있었다.
1975년 베트남이 무너졌다. 사이공 상공에서 마지막 헬기가 사라진 뒤, 맹호·청룡 부대의 태권도 교관들은 뿔뿔이 세계로 흩어졌다. 이 이산(離散)의 물결은 유럽을 비껴가지 않았다. 제도의 장벽 앞에서도 한국 사범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땅을 일궜다. 김영구는 그 땅을 일군 이들 중 가장 깊이 이베리아반도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었다.
[전국체전 3연패 · 예산의 챔피언]
충남 예산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를 설명하는 데 자주 등장한다. 예산은 충청도 농촌의 작은 고장이다. 그런 곳에서 전국체전 3연패 챔피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당시 무예계에서는 화젯거리였다. 집안이 반듯하고 예의가 발랐다. '귀공자'라는 별호는 그런 배경에서 붙었다.
3년 후배인 김정호 총재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전국체전에서 세 번을 내리 이겼는데, 이기는 방식이 달랐어요. 기술이 화려한 게 아니라 기술이 깨끗했습니다. 구멍을 찌르는 선수가 아니라 구멍을 만들어서 찌르는 선수였어요. 예산 선배님이 전국을 제패했다는 게 우리 후배들한테는 자랑이었죠."
그러나 그는 도장 밖에서도 귀공자로만 남지 않았다.
1970년대 이태원은 미군 부대와 유흥가가 뒤얽힌 특수한 지대였다. 크고 작은 조직들이 할거했다. 어느 날, 지역 조직의 두목이 도장 쪽으로 행패를 부리러 왔다. 김정호 총재의 구술에 따르면, 그 대련은 길지 않았다. 두목이 일어나지 못했다. 치아가 여덟 개 부러졌다. "그 뒤로는 그 일대 어떤 조직도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다"는 게 당시 무예계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카세레스로 · 1979년]
1979년, 김영구는 짐을 쌌다. 목적지는 스페인의 카세레스(Cáceres)였다.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주의 주도(州都).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돌의 도시였다. 한국의 젊은 무예인이 왜 하필 그 도시를 택했는지의 내력은 구전 속에만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태권도는 여전히 가라데의 친척 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명의 남동생 태권도 사범과 합기도 사범인 처남도 그의 부름을 받아 스페인으로 건너왔다. 가족이 함께 움직인 것이다. 예산에서 시작된 한 집안의 이야기가 이베리아반도 한복판에서 계속됐다.
[싸움은 발차기로만 하지 않는다]
김영구는 기술만으로 싸우지 않았다. 시범 단체를 조직했다. 스페인의 체육 관료들을 찾아다녔다. 태권도와 가라데는 뿌리부터 다른 무예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발차기의 구조와 속도와 철학이 다름을 증명했다. 수년에 걸친 설득과 시범이 쌓였다. 마침내 스페인 체육부는 태권도를 가라데와 분리된 독립 종목으로 인가했다.
"카라테? 우리가 먼저다. 뿌리가 다르다." — 김정호 총재의 구술에 따른 김영구의 지론
그 과정에서 그는 한 사람의 이름과 가까워졌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바르셀로나 출신의 스포츠 행정가는 1966년부터 스페인 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80년 IOC 위원장에 취임하는 인물이었다. 김정호 총재의 구술에 따르면, 사마란치가 IOC 위원장이 되기 전,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김영구와 접점이 있었다. 스페인의 체육 행정 주류가 태권도라는 한국 무예를 인식하게 된 데에 김영구의 활동이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 데에 스페인 사람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 스페인 사람들 옆에 김영구가 있었어요. 내 예산 선배가." — 김정호 총재 구술 (2026)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 종목,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채택으로 이어지는 긴 흐름은 이처럼 한 사람이 카세레스 광장에서 발을 올리던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름이 도시에 새겨지다]
김영구는 카세레스에 뿌리를 내렸다. 도장을 열었고, 사범을 키웠고,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체육단지가 그 도시에 세워졌다. 충남 예산의 한 작은 고장에서 예산중학교를 나온 청년이, 이베리아반도 한 도시의 지명(地名)으로 새겨진 것이다.
예산중학교 17회. 그 선배의 이름이 스페인 카세레스에 살아 있다. 같은 교정을 밟은 20회 후배 김정호 총재는 그 사실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같은 말을 덧붙인다.
"고향 선배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예산이 작은 고장이지만, 그 고장에서 나온 사람이 스페인에 이름을 새겼어요."
[마무리]
멕시코에서 문대원이 한국·미국·멕시코·스페인 4강국 체제의 교두보를 놓았듯, 유럽에서 김영구가 열어놓은 길은 이후 스페인과 유럽 무예 시장으로 한국 무예가 진입하는 통로가 됐다. 한국 무예의 세계화는 국가 주도의 전략이 아니었다. 맨손의 사범 한 명이 낯선 광장에 서는 것으로 시작됐다. 뒤에서 국가가 따라온 것이다.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는 그 시절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짐을 싸서 갔어요. 그냥 거기서 살기로 한 겁니다. 그게 세계화였어요." — 김정호 총재 구술 (2026)
[인물 정보]
김영구(金永求) 대사범 — 예산중학교 17회. 충남 예산 출신. 전국체전 태권도 핀급 3연패 챔피언. 1979년 스페인 카세레스 진출. 스페인 체육부의 태권도 독립 종목 인가 획득에 기여.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접점. 카세레스에 본인 이름을 딴 체육단지 설립.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1920~2010) —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 1966년 스페인 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980~2001년 제7대 IOC 위원장. 태권도 올림픽 시범·정식 종목 채택 시기 IOC 수장.
김정호(金正鎬) 총재 — 예산중학교 20회.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1982년 7월 24일 안양 해동검도 도장 창립. 이 연재의 구술자.
다음 회 → 제4회 — 서울이 아닌 미국 뉴저지, 그리고 대우(大宇). 김우중 회장의 세계 지사망과 합기도를 결합하려 했던 원대한 꿈, 그 꿈이 무너진 이유를 추적한다. 「대우(大宇)와 합기도의 세계화 — 김우중 회장과 지한재 총재의 꿈」
※ 이 글은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의 구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인물의 경력과 사건 경위는 구술자의 기억과 제보에 근거하며, 각 회차는 김정호 총재의 사전 확인을 거쳐 게재합니다.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부분은 향후 보완 예정입니다. 아울러, 등장 인물 중 일부는 당사자의 요청 또는 편집상의 필요에 따라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저작권자 ⓒ 한국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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