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특별기획]【 제1회 】왜 지금, 이 질문인가…합기도 담론 70년, ‘창시자 논쟁’을 넘어서「뿌리와 가지: 합기도를 만든 두 거장의 기록」— 최용술 vs. 지한재 기여도 정량 분석※ [시리즈 전체 면책조항] 본 시리즈는 합기도 발전사에 관한 학술 자료, 공개 사료, 복수의 언론 보도 등을 교차 검토하여 작성한 독립 저널리즘 기획물입니다. 본 기사에 서술된 인물별 평가 및 정량 수치는 특정 계파나 단체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며, 현존 사료에 근거한 편집국의 분석적 해석입니다.
"합기도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지금으로부터 70년 넘게 한국 무예계를 분열시켜 왔다. 어떤 도장에서는 최용술(崔龍述)의 사진이 성소처럼 걸려 있고, 어떤 도장에서는 지한재(池漢載)의 이름이 계보의 최정점에 놓인다. 두 이름을 함께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느 계파에서는 금기이고, 어느 계파에서는 의무다.
이 질문의 문제는 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한국무예신문은 이 오래된 질문을 내려놓고, 새로운 질문을 든다.
"두 인물은 합기도의 발전과 국내외 보급에 각각 어떤 실질적 기여를 하였는가."
이것이 본 시리즈 「뿌리와 가지: 합기도를 만든 두 거장의 기록」의 출발점이다.
2026년 1월 28일, 지한재가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영면했다.
그의 부고를 전한 연합뉴스의 제목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형 합기도' 체계화…지한재씨 별세."
제목 한 줄 안에 이미 두 가지 역사적 판단이 압축되어 있었다. '한국형'이라는 수식어와, '체계화'라는 동사. 이것이 대한민국 공신력 있는 통신사가 그의 생애를 정의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합기도계 안에서는 달랐다. 일부에서는 그를 기술 원형 제공자로, 혹은 명명자 또는 정립자로, 또 일부에서는 계승자로, 또다른 일부에서는 변형자로 불렀다. 그의 부고를 둘러싼 반응은 그 자체로 70년 논쟁의 축소판이었다.
최용술이 1986년 세상을 떠난 지 꼭 40년이 올 해, 그의 핵심 제자 지한재도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두 거장이 모두 역사 속 인물이 된 지금, 이 논쟁을 계속 살아있는 계파 싸움의 연료로 소모할 것인지, 아니면 냉정한 역사적 평가의 대상으로 전환할 것인지—그 선택의 시간이 왔다.
한국무예신문 편집국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 시리즈가 새롭게 조명하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
본 시리즈는 기존의 합기도 기여도 논의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두 개의 결정적 사건을 핵심 증거로 새롭게 제시한다. 【첫 번째 사건】 1967년 5월 25일 — 국가 대 국가의 합기도 외교, 리볼버 권총 450정과 합기도의 교환
1967년 5월 25일, 지한재를 포함한 합기도 사범단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파견으로 미국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s—미국 공군특별수사대)를 향해 출국했다. 단장은 당시 육군 중령으로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으로 지내다 청와대에 발탁된 김운용(金雲龍)이었다.
이 파견의 배경에는 놀라운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 미국 OSI는 앞서 대한민국 청와대 경호실에 리볼버 권총 450정을 기증한 바 있었다. 합기도 사범단의 파견은 바로 그 기증에 대한 답례(答禮) 성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기와 무예의 교환. 이것은 단순한 문화 교류가 아니었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던 1960년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정보·경호 기관이 실전 전투 역량을 서로 주고받은 국가 대 국가의 안보 협력 행위였다. 합기도가 이 교환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이 무술이 당시 대한민국 국가 안보 체계 안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파견이 가능했던 구조적 배경에는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1965년 7월 2일 설립된 대한합기도협회의 초대 회장은 박종규(朴鍾圭)였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다. 합기도 공식 단체의 수장과 청와대 경호실의 수장이 동일 인물—이 구조가 1967년 OSI 파견을 가능하게 한 실질적 토대였다.
지한재는 이 임무의 실행자로서 미국 OSI 요원들에게 합기도를 직접 지도했다. 리볼버 권총과 교환된 한국의 무예가, 지한재의 손을 통해 서구 정보기관의 훈련 체계 안에 이식된 것이다.
그러나 이 파견에는 극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500m 앞까지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김신조 청와대 기습 사건)가 발생했다.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경험한 가장 심각한 안보 위기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 OSI 합기도 전수 임무를 수행 중이던 지한재와 사범단은 이 사태로 인해 즉시 귀국 명령을 받고, 임무를 중단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합기도를 가르치러 태평양을 건넜던 이들은, 청와대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무예의 국제 전파 임무와 국가 안보 위기가 정확히 교차한 순간—이것이 1967~68년 대한민국 합기도 외교의 실제 풍경이었다.
훗날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와 IOC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외교의 정점에 선 김운용이 이 임무의 단장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파견의 공식적이고 전략적인 성격을 방증한다. 정부는 무예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해 외교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물을 단장으로 세웠다. 합기도는 그렇게, 총과 함께 오간 무예로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두 번째 사건】 연대 추후 확인 필요 — 문화공보부, 두 거장을 함께 영문 영상에 담다
두 번째 사건은 합기도 기여도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가장 덜 알려진 사료다.
대한민국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는 대한합기도협회와 함께 합기도 시범 및 호신술을 내용으로 한 홍보 영상을 영어(英語)로 제작했다. 그리고 이 영상 안에는 최용술과 지한재,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거론되었다.
※ 이 영상의 제작 연도는 현재 영상 제작에 직접 참여한 관계자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확한 연도는 국가기록원·한국영상자료원 등 공공 아카이브를 통한 원본 발굴과 추후 공식 확인이 필요하다. 본 시리즈는 영상의 존재 자체와 그 핵심 내용—최용술·지한재 공동 거론, 대한합기도협회 참여, 영문 제작—은 확인된 사실로 기술하되, 제작 연도는 '추후 확인 필요'로 유보함을 밝혀둔다.
이 사실이 합기도 기여도 논의에서 갖는 의미는 단층적이지 않다. 세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읽혀야 한다.
첫째, 이것은 대한민국 국가기관이 두 거장을 공식적으로 함께 인정한 기록이다. 한국 무예계가 70년간 '최용술이냐, 지한재냐'를 두고 분열해 있는 동안, 문화공보부와 대한합기도협회는 그 논쟁을 넘어서 있었다. 국가가 제작한 공식 영상에 두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는 것은, 당시 국가 기관의 공식 인식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둘째, 영어로 제작된 이 영상(한국어 버전도 존재한다는 설 있음)은 국제 배포를 목적으로 했다. 문화공보부의 홍보물은 전 세계 한국 대사관과 한국문화원 네트워크를 통해 배포되는 것이 관례였다. 'Hapkido'라는 이름과 두 거장의 이름이 외교 채널을 통해 세계에 공식 전파된 순간이었다.
셋째, 대한합기도협회가 이 영상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 협회가 합기도의 공식 대표 기관으로 국가에게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협회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한 인물이 지한재였다는 사실과 맞물려, 이 영상은 지한재의 조직 제도화 기여가 국가 수준에서 공식 승인된 산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부르는 '합기도(合氣道)'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 합기도의 기술적 뿌리가 되는 무술은 귀국 직후 최용술의 입을 통해 '야와라(やわら)', '합기유술(合氣柔術)', '대한합기유권술(大韓合氣柔拳術)'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길고 낯설고, 무엇보다 이 무술의 정체성을 한국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인 명칭들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합기도'라는 이름을 과감하게 채택해 서울 한복판에 내걸지 않았다면,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그 이름을 1967년 미국 OSI에 공식 소개하고, 이후 문화공보부의 영문 홍보영상에 두 거장의 이름과 함께 담아 세계에 배포하지 않았다면, 이 무술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브랜드이며, 역사다. 그리고 국가가 그 이름을—두 거장의 이름을 함께—공식 기록에 담는 순간, 그 이름들은 민간의 영역을 넘어 국가적 자산이 된다.
본 시리즈의 정량 평가는 6개 대영역, 10개 세부 항목, 100점 만점 루브릭으로 설계되었다.
첫째, 1967년 5월 25일 미국 OSI 합기도 파견 임무를 D5-①(해외 직접 보급) 항목의 핵심 근거로 반영한다. 이 임무가 미국의 리볼버 권총 450정 기증에 대한 답례 성격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임무 수행 중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1.21 사태로 즉시 귀국했다는 사실은 기존 합기도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역사적 사료다.
둘째, 1965년 7월 2일 대한합기도협회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였다는 사실을 D3-③(국가기관 채택)과 D4-①(단체 설립·제도화) 항목의 핵심 근거로 반영한다. 국가 경호기관의 수장이 합기도 단체의 수장을 겸임했다는 것은 이 무술의 국가 제도권 편입이 얼마나 깊고 공식적인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셋째, 문화공보부 영문 홍보영상(제작 연도 추후 확인 필요)을 D3-③과 D5-② 두 영역에 동시에 반영하되, 이 영상이 최용술·지한재 두 거장을 함께 거론했다는 사실은 양측 평가 모두에 국가 공인의 근거로 작동함을 명시한다.
최용술(崔龍述, 1903~1986)은 충청북도 영동(옛 황간) 출신이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과 접점을 형성한 후,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해 대구에 정착했다. 극심한 빈곤 속에서 풀빵 장사와 양돈업으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간직한 기술의 씨앗을 놓지 않았다.
1951년 2월 12일, 유도 유단자였던 서복섭의 도움으로 대구에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의 간판을 내걸었다. 한국 합기도의 제도적 태동이었다. 이후 지한재·김무홍·문종원 등이 입문하여 현대 합기도를 이끌어갈 1세대의 인적 인프라가 이 좁은 도장에서 만들어졌다.
1968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전국합기도 통합시범대회에서 합기도 도주(道主)로 공식 추대된 그는, 1986년 대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후 어느 시점, 자신의 이름은 대한민국 문화공보부가 제작한 영문 홍보영상에 지한재의 이름과 나란히 새겨졌다.
그러나 최용술이 끝내 내걸지 않은 간판이 있었다. 바로 '합기도(合氣道)'였다.
지한재(池漢載, 1936~2026)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최용술 문하에서 기술의 뼈대를 익힌 후, 1957년 3월 20일 서울 성무관(成武館)을 창설하며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 '합기도'라는 세 글자를 공식 명칭으로 처음 내걸었다.
1965년 7월 2일에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초대 회장으로 한 대한합기도협회가 공식 설립되었다. 국가 경호기관의 수장이 합기도 단체의 수장을 겸임하는 이 구조는, 합기도가 민간 무술의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 국가 안보 체계의 일부로 편입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1967년 5월 25일, 지한재는 대한민국 정부 공식 파견으로 미국 OSI로 향했다. 이 임무는 OSI가 청와대 경호실에 기증한 리볼버 권총 450정에 대한 답례 성격이었다. 실전 무예와 실전 무기가 교환되는 냉전의 안보 협력—지한재는 그 교환의 현장에서 합기도를 직접 지도했다.
그러나 1968년 1월 21일, 임무는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500m 앞까지 침투한 '김신조 1.21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지한재와 파견 사범단은 즉시 귀국 명령을 받고 임무를 중단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합기도를 가르치러 태평양을 건넜던 이들은, 청와대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이후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Game of Death, 1978)》에서 합기도 고수 역으로 전 세계 수억 관객 앞에 섰고, 1984년 미국으로 이주해 신무합기도(神武合氣道, Sin Moo Hapkido)를 창시하며 세계 무예계에 지워지지 않는 궤적을 그렸다. 2026년 1월 28일, 향년 89세로 영면했다.
한 사람은 씨앗을 심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 씨앗에 이름을 붙이고,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미국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두 행위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1967년의 현장: 리볼버 권총 450정과 합기도의 교환
1967년 5월 25일의 OSI 파견 임무를 둘러싼 맥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OSI가 대한민국 청와대 경호실에 리볼버 권총 450정을 기증한 것은 단순한 군사 원조가 아니었다.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과 미국의 안보 동맹이 실물로 교환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답례로 가장 실전적인 자국의 무예—합기도—를 돌려보냈다.
이 교환 구조를 이해할 때 비로소 1965년의 대한합기도협회 설립이 새롭게 읽힌다. 초대 회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은 단순히 합기도 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미국 안보 협력의 핵심 실무자였으며, 합기도를 그 협력 체계 안에 공식 자산으로 위치시킨 인물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합기도 단체의 수장을 겸임했다는 사실은, 이 무술이 민간 체육 단체의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 국가 안보 기관의 공식 무예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지한재는 이 구조의 실행자였다. 그가 성무관을 중심으로 축적한 기술적 완성도와 지도 능력이 있었기에, 국가는 그를 미국 OSI 앞에 세울 수 있었다. 리볼버 권총과 교환된 한국의 무예가 '합기도'였고, 그 합기도를 직접 전달한 사람이 지한재였다.
그리고 임무는 역사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1968년 1월 21일의 1.21 사태는 단순한 안보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기도의 국제 보급 임무와 국가 생존이 충돌한 순간이었다. 지한재 일행이 즉시 귀국한 것은 그들이 무예의 전도자인 동시에 국가 안보의 일원이었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국가가 두 거장을 함께 기록하다 — 문화공보부 영문 홍보영상
두 번째 사건은 합기도 기여도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함의를 지니는 사료다.
대한민국 문화공보부가 대한합기도협회와 함께 합기도 시범 및 호신술을 내용으로 한 홍보 영상을 영어로 제작했다. 이 영상에는 최용술과 지한재,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었다.
이 영상의 제작 연도는 현재 영상 제작에 직접 참여한 관계자의 기억에 기반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제작 연도의 공식 확인은 추후 국가기록원·한국영상자료원 등 공공 아카이브의 원본 발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본 시리즈는 이 사실의 충분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제작 연도에 관해서는 확정적 서술을 유보한다.
그러나 제작 연도의 미확정이 이 사건의 무도사적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핵심은 '언제'가 아니라 '무엇을 담았는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가기관이 제작한 공식 영문 영상이 최용술과 지한재를 동시에 합기도의 역사적 인물로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영어(한국어 버전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짐)로 제작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어로 제작된 것으로 봐 타겟을 해외로 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문화공보부의 홍보물이 전 세계 한국 대사관과 한국문화원 네트워크를 통해 배포되는 관례를 감안하면, 두 거장의 이름은 외교 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대한합기도협회가 이 영상 제작에 공식 참여했다는 사실은, 지한재가 설립하고 주도한 이 협회가 당시 합기도의 공식 대표 단체로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는 지한재의 조직 제도화 기여(D4)와 국가기관 채택(D3-③) 항목 평가의 중요한 정량적 근거가 된다.
핵심 연표: 성무관 자료에서 기반한 확인된 사실들
역사적 인물 비교 평가에서 사료 비판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본 시리즈는 두 인물 모두에게 동등한 사료 비판 원칙을 적용했다.
최용술에 관해서: 오랜 기간 통용되어온 '다케다 소카쿠의 양자·30년 내제자'라는 서사는 2020년 KCI 등재 논문(성도원·최종균·백경화)이 영명록(英名錄)과 사례록(謝禮錄)을 분석한 결과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확인된 사실은 최용술이 1942년 다케다 소카쿠의 강습회에 각 약 10일씩 2회(총 약 20일) 참가했다는 것이다. 30년 양자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럼에도 그가 대구에서 제자들에게 전수한 기술의 압도적 실전성은 어떤 사료 수정으로도 훼손되지 않는다.
지한재에 관해서: 발차기의 90% 이상을 자신이 창안했다는 주장은 본인 구술에 기반하며 독립적 검증이 제한적이다. '이도인(李道人)'으로부터 삼랑도태기를 전수받았다는 서술은 학계의 사료 확인이 충분하지 않다. '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주체에 관해서는 서복섭의 정무관 계열이 선행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1967년 OSI 파견 임무에 관해서: 1967년 5월 25일 출국,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로 즉시 귀국한 사실은 대한합기도협회 오세림 총재 증언에 기반한다. 임무의 정확한 교육 내용, 참가 인원(현재 확인된 인원은 김운용 단장, 지한재, 오세림, 김성근 등 4명), 이후 OSI 훈련 체계 편입 여부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추가 공공기록 (국가기록원, 미국 정보자유법 FOIA 청구 기록 등) 발굴이 필요하다.
문화공보부 영문 홍보영상에 관해서: 영상의 존재, 최용술·지한재 두 명 공동 거론, 대한합기도협회의 참여, 영문 제작, 합기도 시범 및 호신술 내용은 확인된 사실이다. 단, 제작 연도는 영상 제작 참여자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어 공식 확인이 필요한 상태다. 국가기록원·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에서의 원본 발굴을 통한 추후 공식 검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본 시리즈는 제작 연도를 특정하지 않는다.
'합기도 창시자 논쟁'이 70년간 해소되지 않은 이유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질문이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는 이미 어느 시점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두 이름을 함께 기록한 것이다.
"최용술과 지한재 중 누가 창시자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정답을 전제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구조로 움직이지 않았다. 최용술은 기술의 원형을 창출했다. 지한재는 그 원형에 '합기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청와대 경호실과 미국 OSI와 백악관과 세계 무술 영화 스크린에 그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공보부의 영문 홍보영상에 두 거장의 이름을 나란히 담아 세계에 배포했다. 이 각각의 단계는 서로 다른 종류의 기여였고, 국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본 시리즈는 이 구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창시자 대 체계화자'의 이분법 대신, 두 인물을 '역사적 역할 연속선 위의 상호보완적 기여자'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그 재정의를 감성적 선언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사료와 수치로 뒷받침한다.
이 연재를 읽는 법: 5회 구성 안내
제1회 (이번 호) 왜 지금, 이 질문인가 — 기획 취지, 1967년 OSI 파견과 1.21 사태 귀국, 문화공보부 영문 영상, 핵심 연표, 두 인물 생애 초상, 사료 비판 원칙, 평가 체계 개요
제2회 이름이 역사가 될 때 — '합기도'라는 세 글자의 탄생 — 최용술이 외면한 이름, 지한재가 선택하고 국가가 공인한 이름의 여정. 1967년 OSI에 전달된 이름, 영문 영상에 새겨진 두 이름의 의미
제3회 국가가 무술을 선택할 때 — 박종규 경호실장, OSI, 문화공보부, 그리고 합기도— 청와대 경호실장이 합기도 협회 회장이 된 날(1965), 리볼버 권총과 교환된 합기도(1967), 1.21 사태와 즉시 귀국(1968), 문화공보부 영문 영상. 각 사건의 정량적 반영
제4회 세계로 간 '합기도' — OSI에서 영화 제목까지, 국제 표준어가 된 세 글자— 1967년 OSI → 1968년 1.21 귀국 → 브루스 리 →《사망유희》 → 문화공보부 영문 영상 → 41년 세계 순회. 국제화 전 경로
제5회 (최종회) 숫자가 말하는 역사 — 정량 평가의 완결— 100점 만점 종합 득점표, 1967년 OSI 파견·1.21 귀국·박종규 경호실장 반영 근거, 민감도 분석 5개 시나리오, 편집국 최종 소견
이 질문에 답할 책임
한국무예신문이 창간 15년의 세월 동안 무예계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 있다.
"합기도는 하나인데, 왜 이렇게 많은 단체가 싸우는 겁니까."
이 질문의 뿌리에는 두 거장의 기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는 이미 그 답을 낸 바 있다. 두 이름을 함께 기록했다.
최용술이 뿌린 씨앗의 무게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면, 합기도의 뿌리가 흔들린다.
지한재가 그 씨앗에 이름을 붙이고 1968년 국가의 이름으로 미국 OSI의 문을 두드리고 세계로 들고 나아간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합기도의 현재가 부정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두 이름을 영문 영상에 나란히 담아 세계에 내보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합기도의 공식 기억이 불완전해진다.
역사를 바로 기록하는 것, 제자리 이름을 붙이는 것(正名),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세 가지가 창간 15년간 한국무예신문이 이 분야에서 수행해 온 핵심 임무였다. 이 시리즈는 그 임무의 가장 직접적인 실천이다.
수치는 역사를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수치는 역사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 다음 호 예고 제2회 「이름이 역사가 될 때 — '합기도'라는 세 글자의 탄생」 1967년 OSI에 전달된 이름, 영문 영상에 새겨진 두 이름의 전 여정을 추적한다.
※ [제1회 개별 면책조항] 본 기사에 기술된 인물별 사적(史的) 사실은 국내외 학술논문, 언론 보도, 공식 협회 자료 등을 교차 검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최용술의 출생연도는 1899년설·1903년설·1904년설이 학계에서 병존하며, 본 시리즈는 2020년 KCI 논문(성도원·최종균·백경화)에서 제시된 1903년설을 잠정 채택합니다. 이는 향후 추가 사료 발굴에 의해 수정될 수 있습니다.
1967년 미국 OSI 합기도 파견 임무 관련 서술은 대한합기도협회 오세림 총재(1967년 당시 청와대 경호실 근무) 증언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출국 일자 1967년 5월 25일, 미국 OSI의 리볼버 권총 450정 기증에 대한 답례 성격,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로 인한 즉시 귀국은 해당 자료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임무의 정확한 교육 내용, 이후 OSI 공식 훈련 체계 편입 여부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추가 공공기록(국가기록원, 미국 정보자유법 FOIA 청구 기록 등) 발굴이 필요함을 밝힙니다.
1965년 대한합기도협회 설립 및 초대 회장 박종규 관련 서술은 합기도성무관 자료에 기반합니다. 박종규의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직위는 공개 역사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문화공보부 영문 합기도 홍보영상 관련 서술에 대해 다음 사항을 명시합니다. ① 영상의 존재, 최용술·지한재 두 명 공동 거론, 대한합기도협회의 참여, 영문 제작, 합기도 시범 및 호신술 내용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② 단, 영상의 제작 연도는 현재 영상 제작에 직접 참여한 관계자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공식 문서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제작 연도를 포함한 영상의 제목·러닝타임·배포 수량 및 경로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에서의 원본 발굴을 통한 추후 공식 확인이 필요합니다. 본 시리즈는 원본 발굴 결과에 따라 관련 서술을 즉시 수정·보완할 것을 약속합니다.
'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주체에 관해서는 학계 내 이견이 존재하며, 본 시리즈는 최초 사용의 선후보다 명칭의 전국화·국제화·국가 공인 기여를 평가 기준으로 삼았음을 밝힙니다.
본 기사의 모든 평가적 서술은 특정 무예 단체나 계파의 공식 입장이 아닌 편집국의 독립적 학술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이의가 있는 단체 또는 개인은 한국무예신문 편집국으로 서면 이의를 제출하실 수 있으며, 편집국은 이를 성실히 검토할 것을 약속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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