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특집] 한자(漢字)가 새긴 전쟁 ② : 조선이 체계화한 무예의 문명무예(武藝)·무술(武術)·무도(武道), 한중일 삼국이 쟁탈한 언어적 영토
|
![]() ▲ 무예(武藝)·무술(武術)·무도(武道), 한중일 삼국의 언어적 영토 쟁탈전을 형상화한 이미지. ©한국무예신문 |
역설이 있다
역설이 있다.
무예(武藝)라는 말의 고향은 중국 고전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나의 국가적 편찬 사업으로 조직하고, 그림과 설명, 한글 언해까지 결합해 높은 문헌적 완성도로 끌어올린 중요한 사례는 조선에서 나왔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이 한 권의 문헌은 조선이 무예라는 언어를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국의 군사 현실과 제도적 필요 속에서 다시 구성했음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다.
그러나 이 성취를 말할 때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무예도보통지》가 비춘 것은 봉우리였다. 그 아래에는 문헌이 모두 포착하지 못한 거대한 산의 몸통이 있었다. 씨름판의 흙바닥과 택견꾼의 발디딤, 이름 없이 이어진 민중의 몸이 그 아래를 떠받치고 있었다.
봉우리는 빛난다.
그러나 산을 산답게 하는 것은 결국 몸통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
《무예도보통지》라는 편찬 행위는 분명 성취였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권력적 선택이기도 했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어떤 몸을 국가의 무예로 승인하고, 어떤 몸을 제도의 바깥에 남겨둘 것인가.
조선 무예사의 진짜 지형은 이 두 층위를 함께 볼 때에만 드러난다.
관의 언어와 민의 몸.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바로 조선 무예 문명의 핵심이다.
【핵심 요약】
이번 2회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조선은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무예(武藝)라는 말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에 걸친 군사적 반성과 편찬 작업을 통해 조선의 현실에 맞는 무예 체계로 재구성했다. 《무예제보》(1598)에서 《무예신보》를 거쳐 《무예도보통지》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한 세대의 즉흥이 아니라 왕조 차원의 누적이었다.
둘째, 《무예도보통지》는 이덕무·박제가·백동수라는 이례적 조합의 협업을 통해 문(文)과 무(武), 이론과 실기, 문명어와 조선어를 결합한 문헌적 성취였다. 특히 그림, 설명, 한글 언해를 함께 둔 방식은 동아시아 무예 문헌사에서 독자적 위상을 지닌다.
셋째, 그러나 《무예도보통지》가 기록한 것은 국가가 승인한 몸의 언어였다. 십팔기의 선별 기준은 학문적 판단인 동시에 정치적·군사적 선택이었다. 그 바깥에는 씨름과 택견처럼 문헌보다 몸으로 오래 이어진 민중의 무예 전통이 있었고, 기록의 시선이 닿지 않은 더 많은 몸들이 있었다.
武藝 — 단어의 고향과 그 함의
무예(武藝)라는 말은 중국 고전에 이미 등장한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 武藝는 무인의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글자는 藝다.
藝는 단순한 손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중국 고대의 육예(六藝), 곧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에서 알 수 있듯이, 藝는 인간이 익히고 닦아야 할 소양과 교양의 총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활쏘기[射]와 수레 몰기[御]가 육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무의 기술은 처음부터 단순한 전투 능력으로만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은 문명화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능력의 일부로 읽힐 수 있었다.
무예는 따라서 태생부터 이중적 언어다.
武는 창과 칼의 세계를 가리킨다.
藝는 그것을 수양과 교양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무예라는 단어 안에는 전투와 문명, 몸과 정신, 기술과 소양의 긴장이 처음부터 들어 있었다. 이 단어를 중국 고전으로부터 받아들인 조선은 그 긴장을 조선의 역사와 제도 안에서 새롭게 조직했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결실 가운데 하나가 《무예도보통지》였다.
조선의 재구성 — 200년의 누적
조선의 무예 체계화는 평온한 학술 사업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 출발점에는 전쟁이 있었다.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조선을 강타한 이 전쟁은 조선 군사 체계의 약점을 드러냈다. 충분히 훈련되지 못한 병사들, 체계화되지 못한 전투 기술, 일본의 조총과 검술에 대응할 준비가 부족했던 군영. 전쟁은 조선으로 하여금 자국의 무예 체계를 근본부터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중국의 무예 이론과 일본의 전투 기술을 동시에 참조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중요한 참조 문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번역이나 이식이 아니었다. 《기효신서》가 중국 남방 해안의 왜구 방어라는 특수한 지형·기후·군사 조건에서 나온 텍스트임을 조선의 편찬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척계광의 이론을 가져오되, 조선의 지형과 병사 구성, 훈련 현실에 맞게 재배치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직접 맞닥뜨린 일본의 검술, 곧 왜검 기술 역시 조선 군사 현실 안으로 끌어들여졌다.
여기서 조선의 실용성이 드러난다. 조선은 외래 기술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적의 기술이라도 필요하다면 배웠다. 그러나 그대로 모방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조건 안에서 다시 배치하고 소화했다.
이 과정은 선조 대의 《무예제보(武藝諸譜)》(1598년) 편찬으로 처음 결실을 맺었다. 훈련도감에서 편찬된 이 문헌은 6기의 군사 기술을 담았다. 이후 영조 대에 편찬된 《무예신보(武藝新譜)》는 18기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790년 정조 대에 이르러 《무예도보통지》로 완성되었다.
선조에서 정조까지. 임진왜란의 충격에서 완성까지 약 200년.
그것은 한 세대의 즉흥적 산물이 아니라, 왕조 차원의 누적과 갱신이 쌓아올린 결과였다.
1790년의 기획 — 세 사람의 협업, 그리고 그 정치적 맥락
정조는 단순한 군사 교범만을 원하지 않았다.
1790년,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 그리고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 백동수(白東脩)에게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명했다.
이 세 사람의 조합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학파 실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뛰어난 학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자(庶子) 출신이었다. 조선의 신분 질서 안에서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정규 문과를 통한 출세가 막혀 있던 지식인들이었다.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한 것은 그 자체로 신분 질서의 경계를 넘는 행위였다. 백동수는 무예 실기를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책상 위의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기술을 알고 있었다.
문(文)과 무(武)의 결합.
이론과 실천의 협업.
서출(庶出)의 지식인과 무인의 공동 작업.
이 편찬 조합은 정조의 왕권 강화 기획과 맞닿아 있었다.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된 1790년은 장용영이 설치된 지 2년 후였다. 장용영은 정조가 노론 등 기존 세력의 군사적 기반을 견제하기 위해 창설한 친위 군영이었다. 따라서 《무예도보통지》는 단순한 문화 기록물이 아니라 장용영의 훈련 체계와 직접 연결된 국가적 군사 기획이었다.
다시 말해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는 정조의 정치적 기획과 장용영의 군사적 필요 속에서 선별되고 체계화된 신체 기술이었다.
이 편찬 사업이 집대성한 것은 24가지 무예 체계였다. 창[槍], 검[劍], 곤봉[棍], 편[鞭], 기마 무예에 이르기까지 각 기예는 그림[圖]과 설명[譜], 그리고 한글 언해를 통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취의 배경에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동력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 문헌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 문헌을 더 복합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위대한 성취는 언제나 특정한 권력의 필요 속에서 탄생한다. 문제는 그 성취의 결실이 그 권력적 맥락을 넘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넓게 의미를 지속하는가다.
조선 무예 문헌의 독자성
《무예도보통지》의 의미는 단순히 많은 기술을 모았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조직했는가다.
이 문헌은 무예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글로 설명하며, 다시 한글 언해로 풀어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교육과 전승을 염두에 둔 구성이다. 몸의 움직임을 문헌의 언어로 옮기고, 다시 그 문헌을 통해 몸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시도였다.
한글 언해의 존재는 특별히 중요하다. 한문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공통 지식 언어였다. 그러나 한문만으로는 실제 수련과 교육의 현장에 충분히 닿기 어려웠다. 무예는 읽는 지식이 아니라 익히는 지식이다. 몸으로 따라 해야 하고, 반복을 통해 감각으로 익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글 언해는 무예 지식을 더 넓은 수련자의 몸으로 내려보내려는 장치였다.
한문 본문이 문명의 언어라면, 한글 언해는 몸에 가까운 언어였다.
그림이 눈으로 보는 길이라면, 언해는 몸으로 따라가는 길이었다.
《기효신서》를 참조했지만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었다. 중국식 창법은 조선의 조건 속에서 재배치되었고, 왜검 기술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거쳐 조선식으로 소화되었다. 동아시아 무예 문헌사에서 다양한 병장기와 신체 기술을 도해·해설·언해의 형식으로 종합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런 점에서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이 남긴 중요한 문명 텍스트이자, 동아시아 무예 문헌사에서 독자적 위상을 지닌 자료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그 문헌은 누구의 몸을 기록했는가.
그리고 누구의 몸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관(官)의 무예 — 편찬 행위의 권력성
국가는 특정 신체 기술을 선별한다.
그 기술을 기록한다.
그 기록을 통해 정식 무예로 승인한다.
기록에 편입된 몸은 공인된 무예가 된다. 편입되지 못한 몸은 잡기나 민속으로 분류되거나, 아예 역사의 시야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별되었는가. 장용영의 군사적 훈련 필요성이 핵심 기준이었다. 병사들이 전장에서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병장기 기술, 정조의 친위 군영이 보유해야 할 신체 자산. 그 기준을 충족한 기예는 십팔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 기준 밖에 있던 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택견은 《무예도보통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씨름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국가가 승인한 십팔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택견이나 씨름이 열등한 무예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장용영의 훈련 체계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군영의 필요와 민중의 몸은 애초에 다른 문법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 기록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있다. 조선에서 여성이 수련했던 신체 기술은 공식 무예 문헌의 범위 바깥에 놓여 있었다. 민간에서 전해 내려온 여성의 활쏘기 기록, 궁중 여성들의 무예 수련 흔적이 드물게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체계적 기록 대상이 아니었다. 국가가 기록하는 몸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수요를 충족하는 남성의 몸이었다.
이덕무·박제가·백동수의 편찬 작업은 분명 빛나는 성취였다. 그러나 그 편찬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택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야 한다.
무엇을 십팔기 안에 넣을 것인가.
무엇을 그 바깥에 둘 것인가.
어떤 몸을 국가의 무예로 부를 것인가.
그 결정은 학문적 판단인 동시에 권력적 선택이었다.
관의 언어로서의 무예는 관이 필요로 하는 무예였다. 제도 안에서 관리되고 선별된 신체 기술. 봉우리는 국가의 시선이 비춘 곳에서 빛났다. 그러나 그 빛이 닿지 않는 곳, 문헌의 형식으로 정리되지 않고 교범으로 편입되지 않은 몸의 기술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민(民)의 몸 — 씨름판과 골목의 택견
같은 시대, 제도 밖의 조선 민중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몸의 문법을 이어가고 있었다.
씨름은 명절과 공동체 공간에서 살아 있었다. 단오와 추석의 씨름판은 군영의 교련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축제이자 힘의 언어였고, 몸과 몸이 맞붙어 질서와 자존을 확인하는 사회적 의식이었다. 어떤 관의 기록도 씨름을 《무예도보통지》처럼 체계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씨름은 기록 없이도 이어졌다. 샅바를 잡는 법, 중심을 낮추는 법, 상대의 힘을 읽는 감각은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었다.
택견 역시 골목과 장터, 생활의 리듬 속에서 전승되었다. 장터의 청년들 사이에서, 마을의 놀이와 겨루기 속에서, 발디딤과 리듬의 몸짓으로 이어졌다. 국가의 교범에는 없었지만, 민중의 몸속에는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택견과 씨름이 《무예도보통지》보다 낮은 차원의 무예였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른 문법을 가진 몸이었다.
《무예도보통지》가 관의 문법이라면, 씨름과 택견은 민의 문법이었다. 하나는 기록과 제도의 언어로 남았고, 다른 하나는 몸과 공동체의 언어로 살아남았다.
관의 무예는 문헌을 통해 자신을 보존했다.
민의 무예는 몸을 통해 자신을 이어갔다.
그리고 민중의 몸은 단수가 아니었다. 씨름판의 문법과 택견의 문법이 달랐듯이, 지역과 공동체, 성별과 생업에 따라 몸의 언어는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그 다양성은 기록이 없기에 오히려 더 깊이 살아 있었다.
둘 중 하나만으로 조선 무예사를 설명할 수 없다.
봉우리와 몸통
《무예도보통지》는 봉우리다.
그 봉우리는 분명 높고 빛난다. 조선이 전쟁의 충격을 겪은 뒤 외래 기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자국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문헌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서자 출신 지식인들과 무인이 협업하고, 한문과 한글이 공존하며, 그림과 설명과 언해가 하나의 책 안에 통합된 이 문헌은 조선 편찬 문화의 높은 봉우리다.
그러나 봉우리만으로 산은 완성되지 않는다.
산에는 몸통이 있다. 그 몸통은 문헌에 다 적히지 않은 무수한 몸의 기억이다. 농촌의 씨름판, 장터의 택견, 군영 바깥의 힘겨루기와 놀이, 이름 없이 이어진 몸의 기술들. 기록의 시선이 닿지 않은 여성의 신체 언어들. 문파도 이름도 없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 공동체의 신체 지식들.
한국 무예사의 깊이는 바로 이 둘을 함께 볼 때 드러난다.
문헌의 무예와 몸의 무예.
관의 언어와 민의 몸.
기록된 기예와 살아남은 감각.
《무예도보통지》를 높이 평가하는 일은 씨름과 택견을 낮추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반대로 민중의 몸을 강조하는 일도 《무예도보통지》의 문헌적 성취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한국 무예사의 과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봉우리와 몸통을 함께 읽는 데 있다.
기록은 보존이자 배제다
기록은 위대하다.
기록은 사라질 수 있는 기술을 붙잡고, 후대가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든다. 《무예도보통지》가 없었다면 조선 후기 군영 무예의 상당 부분은 지금보다 훨씬 불분명한 형태로 남았을 것이다. 정조의 정치적 기획이 낳은 결과물이 문화적 유산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그 유산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은 언제나 선택이기도 하다.
무엇을 적을 것인가.
무엇을 빼놓을 것인가.
무엇을 정식 무예로 부를 것인가.
무엇을 민속이나 놀이로 남겨둘 것인가.
누구의 몸을 기록하고, 누구의 몸을 시야 밖에 두는가.
기록에 들어간 몸은 역사 속에서 더 쉽게 설명된다. 기록에서 빠진 몸은 후대의 시야에서 흐려진다.
이것은 《무예도보통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Wushu 표준화 과정에서도, 일본의 무도 제도화 과정에서도, 현대 한국의 전통무예 정책에서도 반복되는 문제다.
국가와 제도는 몸을 보존한다.
그러나 동시에 몸을 선별한다.
이 선별의 문제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기록된 무예만을 한국 무예의 전부로 착각하게 된다.
기록은 보존이자 배제다.
그 양면성을 함께 읽는 것이 조선 무예 문명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조선 무예 문명의 진짜 질문
이제 질문은 분명해진다.
조선은 무예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그 체계는 누구의 몸을 담았는가.
조선은 무예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누구의 몸을 남기지 않았는가.
조선은 외래 기술을 수용하고 재구성했다.
그러나 그 재구성의 기준은 누구의 필요였는가.
이 질문들은 《무예도보통지》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가치를 더 깊게 읽기 위한 질문이다.
위대한 문헌일수록 그 안에 담긴 선택의 구조를 함께 보아야 한다. 성취가 클수록 그 성취가 비추지 못한 그림자도 함께 읽어야 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이 남긴 중요한 문명 텍스트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무예의 전부가 아니다.
조선 무예 문명은 문헌 안에만 있지 않았다.
군영 안에만 있지도 않았다.
정조의 명령 안에만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씨름판의 흙냄새 속에도 있었다.
택견꾼의 발디딤 속에도 있었다.
마을과 장터, 놀이와 겨루기, 이름 없는 몸의 기억 속에도 있었다.
그리고 기록이 외면한 자리, 제도가 포착하지 못한 수많은 몸들 속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무예 문명을 말한다는 것은 《무예도보통지》를 높이 세우는 일과 동시에, 그 바깥에서 살아남은 몸들을 다시 부르는 일이어야 한다.
한국 무예 담론의 출발점
오늘날 한국 무예 담론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국에는 《무예도보통지》라는 중요한 문헌 자산이 있다. 한국에는 씨름과 택견이라는 살아 있는 민중 신체의 전통이 있다. 한국에는 태권도와 합기도를 비롯해 세계로 확장된 현대 무예의 현장도 있다.
문제는 이 자산들을 따로따로 바라보는 데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박물관 속 책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씨름과 택견은 민속 행사나 전통놀이의 범주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태권도와 합기도는 현대 스포츠나 도장 산업의 언어로만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큰 언어로 묶어낼 때, 비로소 한국 무예 담론은 힘을 얻는다.
그 언어가 바로 무예다.
무예는 단순한 과거의 말이 아니다. 무예는 기록과 몸, 기술과 수양, 국가와 민중, 전통과 현대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상위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가 살아 있으려면, 국가의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
몸이 살아 있어야 한다.
전승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
지역의 기억이 살아 있어야 한다.
수련의 현장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몸들이 무예의 역사 속에 자기 자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 무예의 미래는 문헌의 복원만으로 열리지 않는다.
몸의 복권이 함께 이루어질 때 열린다.
봉우리를 높이 세우되, 몸통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조선 무예 문명이 오늘의 한국 무예 담론에 남긴 과제다.
다음 회 예고
제3회에서는 중국의 무술(武術)이 어떻게 민중의 생존 기술에서 국가 브랜드 Wushu로 전환되었는지를 추적한다.
術은 쓰임과 숙련의 언어였다. 그것은 관의 문서보다 장터와 사찰, 표국과 문파, 지역 공동체의 몸속에서 오래 살아온 기술의 언어였다. 소림의 권법, 무당의 도가 계통, 표사의 호위술, 비밀결사의 신체 기술. 중국 무술의 생태계는 국가가 관리하기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중국은 이 방대한 민간 무술 전통을 국가 체육과 문화외교의 언어로 재편했다. 무술은 Wushu라는 이름으로 국제 대회와 문화 전략의 장에 올랐다.
그 과정은 세계화의 성공이었는가.
아니면 민중의 몸을 표준화한 또 다른 제도화였는가.
중국의 무술은 한국 무예 담론에 중요한 거울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