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김정호의 劍과 길] 제6회 : 검(劍)의 이름을 둘러싼 전쟁

심검도, 나한일, 그리고 대한검도회 — 명칭 분쟁의 기원

편집부 | 기사입력 2026/05/07 [11:57]

[김정호의 劍과 길] 제6회 : 검(劍)의 이름을 둘러싼 전쟁

심검도, 나한일, 그리고 대한검도회 — 명칭 분쟁의 기원

편집부 | 입력 : 2026/05/07 [11:57]

▲ 김정호 총재(세계해동검도연맹)  © 한국무예신문

1970년 겨울,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 깊은 곳의 토굴 안에서 한 사내가 100일을 버텼다. 엄동설한의 바위 속에서 기도하고, 검법(劍法)을 생각하고, 또 기도했다. 100일이 끝나던 날 그는 토굴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검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몸 안에는 검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창식(金昌植). 그가 내려온 도시는 서울이었고, 그가 연 도장의 이름은 심검술(心劍術)이었다. 그리고 그 도장의 시범 무대를 함께 누빈 세 명의 서라벌고교 16회 동창 중 한 명이 훗날 해동검도를 창시하게 된다.

 

[배경 · 정도술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북 선산(善山) 고양(高陽) 출신의 김창식은 서울에서 무예의 길을 찾았다.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정도술이었다. 안일력 총재의 신임을 얻어 동생 안길원 사범 곁에서 정도술 사범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안일력 총재와 화계사 숭산 이행원 주지 스님 사이의 계약이 끝나면서 정도술은 화계사에서 철수했다.

 

정도술을 떠난 김창식은 정도술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 숭산 이행원 스님의 제자가 됐다. 그 스님으로부터 그는 뜻밖의 말씀을 들었다.

 

"우이동 토굴에서 100일 기도를 하면 검술을 창시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 말이 그를 산으로 이끌었다.

 

[100일 기도 · 검술의 탄생]

 

1970년, 100일의 기도가 끝났다. 김창식은 신당동에 도장 문을 열었다. 무예의 이름은 심검술(心劍術)이었다. 한 손(외수·外手)으로 검을 잡는 것이 특징이었다. 선방어검법, 선공검법, 좌방어검법, 좌공검법, 와좌검법, 와우검법, 몽복검법, 참선검법, 전파검법. 아홉 가지 검법으로 이루어진 무예였다. 이듬해인 1971년, 이름을 심검도(心劍道)로 바꿨다.

 

심검도는 주로 불교 행사의 시범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그 시범의 주역이 된 세 사람이 있었다. 모두 서라벌고교 16회 동창이었다.

 

나한일(羅漢一). 신이철(申二哲). 김정호(金正鎬).

 

세 청년은 김창식 총재의 심검도 무대에 함께 섰다. 훗날 나한일은 탤런트 겸 영화배우로, 신이철은 목사로, 김정호는 해동검도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출발점에서 세 사람은 같은 무대, 같은 검, 같은 청춘이었다.

 

[오사카행 계획 · 무산된 꿈]

 

화계사 숭산 이행원 주지 스님은 일본 오사카에도 분원(分院)을 세웠다. '홍보법원(弘法院)'이라는 이름의 절이었다. 스님은 김창식 총재를 그 절로 초청했고, 김창식 총재는 일본 참선요가의 오끼마루 대선사와 교류하며 심검도의 일본 보급을 구상했다.

 

그 구상에는 나한일·신이철·김정호 세 사람이 포함됐다. 오사카 청풍고등학교로 전학해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뒤, 불교재단 이사인 숭산 이행원 스님의 보증으로 동국대학교에 진학한다는 계획이었다.

 

세 사람은 김창식 총재만 믿었다. 학업 대신 심검도와 시범에 열정을 쏟았다.

 

오사카행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획은 계획으로 남았다. 나한일·신이철·김정호 세 청춘이 간직했던 기대는 공중에 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세 사람의 무예는 멈추지 않았다.

 

[대한검도회의 칼 · 명칭 전쟁의 시작]

 

어느 날, 김창식 총재가 어두운 얼굴로 도장에 나타났다.

 

대한검도회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심검도라는 명칭에서 '검도'라는 단어를 빼고 예전 이름인 '심검술'로 되돌리라는 요구였다. 검도라는 용어는 대한검도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정도술 안일력 총재의 검도 7단 사칭 사건이 이미 그 선례를 만들었다. 대한검도회가 검도 용어를 독점할 수 있다는 무소불위의 분위기가 무예계에 퍼져 있었다.

 

김창식 총재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싸울 근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싸울 여력이 없었다. 1975년, 그는 신당동 도장에서 신설동으로 이전했다가 결국 도장을 폐관했다. 미국 보스턴으로 향했다. 숭산 이행원 스님이 미국에 세운 홍보법원의 초청이었다.

 

"대한검도회가 정도술을 꺾었고, 심검도를 내몰았습니다. 그 칼이 다음에 어디를 향할지는 자명했습니다."

— 김정호 총재 구술 (2026)

▲ 미국 보스톤 세계심검도본부 김창식 총재와 김정호 총재(우측)  © 한국무예신문



[나한일의 새벽 · 여의도광장의 심검도]

 

미국으로 건너간 김창식 총재는 보스턴의 비어 있는 교회를 30년 장기 임대로 인수한 뒤 세계심검도협회를 설립해 보스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검도 보급을 계속했다.

 

1978년, 군 제대 후 기독교방송국 성우로 활동하던 나한일을 한국심검도협회 총관장으로 임명했다. 나한일 총관장은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옥상에서 이원춘·주상모 등 사범들을 양성하며 심검도 보급에 열정을 쏟았다.

 

1980년대 초, 허문도의 방송통폐합이 기독교방송국을 강타했다. 성우였던 나한일은 여의도 KBS 방송인으로 합류했다. 방송인의 삶과 심검도 총관장의 삶이 동시에 이어졌다. 그는 새벽마다 여의도광장에서 심검도를 폈다.

 

그 새벽의 광장에서 나한일은 한 사람을 만났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선배, 배우 주호성이었다. 훗날 장나라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주호성은 당시 한국 검 영화를 제작하려던 연예인 양택조에게 나한일을 소개했다. 양택조는 나한일로부터 심검도를 수련했고, 이두용 감독과 영진영화사 작가 겸 사장 김원우를 나한일에게 소개했다. 이두용 감독은 1970년대 이소룡 영화 붐을 타고 미국 재미동포 한용철을 주역으로 한국 액션영화를 연출하던 전성기 감독이었다. 그들은 '달빛 자루기'라는 영화 제작을 구상 중이었고 주인공을 찾고 있었다.

 

나한일은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미국의 김창식 총재를 사비로 초청해 이두용 감독·김원우 사장·양택조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 만남 이후, 김창식 총재는 설명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한일 총관장에게는 초청 경비의 부담만 남았다.

 

무예와 영화, 꿈과 현실의 간격이 그렇게 넓었다.

 

[1981년 · 김정호가 기천문을 소개하다]

 

그러던 1981년, 나한일 총관장에게 연락이 왔다. 서라벌고교 16회 동창 김정호였다. 기천문(氣天門)이라는 무예를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나한일과 김정호가 심검도 시범에서 함께했던 시절로부터 이미 10년이 흘러 있었다.

 

그 소개가 이후 서초동 도장 인수로, 해동검도 창시로 이어지는 긴 인연의 새 실마리가 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풀어낼 것이다.

 

[대한검도회의 두 번째 칼 · 그리고 세 번째]

 

한편, 대한검도회의 명칭 독점 시도는 결국 정부의 판단에 막혔다. 검도라는 용어는 대한검도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공식 해석이 1980년대 후반 나온 것이다. 정도술의 안일력 총재, 심검도의 김창식 총재, 나한일에게 향했던 칼이 법적 근거를 잃었다.

 

그러자 대한검도회는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해동검도 지도자 자격증 문제였다. 해동검도 지도자에게는 대한검도회가 발급한 자격증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도장 설립과 운영을 막으려 했다. 대한해동검도협회가 문화체육관광부에 청원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해법을 내놓았다. 해동검도 지도자들이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체육지도자 과정의 검도 교육을 이수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자격을 취득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대한검도회는 대한체육회에 이의를 제기했다. 해동검도는 검도 종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체육지도자 교육 자체를 막으려 했다.

 

세 번의 칼이었다. 명칭, 자격증, 교육 차단. 그 세 번의 공세에도 해동검도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민간자격증 제도를 스스로 실시했다. 대한해동검도협회 명의로 해동검도 지도자 자격증을 발행해 현장 지도자들의 자부심을 지켰다.

 

오래된 싸움의 결론을 김정호 총재는 이렇게 압축했다.

 

"굴러온 돌이 오래되다 보니 박힌 돌인 줄 알고 박힌 돌 행세를 하는 겁니다. 겐도가 해방 후 검도가 된 것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검도라는 이름 전체의 주인이 됩니까."

— 김정호 총재 구술 (2026)

 

그리고 지금도 해동검도는 체육시설업 대신 학원·교습소로 분류돼 면세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차량 동승 의무는 체육시설업과 똑같이 진다. 이름 싸움은 끝났지만, 제도의 불균형은 현재진행형이다.

 

[인물 정보]

 

원광 김창식(金昌植) 총재 — 경북 선산 고양 출신. 정도술 활동 후 심검술 창시(1970). 1971년 심검도 개칭. 대한검도회 압박으로 1975년 도장 폐관, 미국 보스턴 이민. 세계심검도협회 설립.

 

나한일(羅漢一) — 서라벌고교 16회. 심검도 시범 주역. 기독교방송국 성우 → KBS 방송인. 한국심검도협회 총관장 역임. 훗날 탤런트·영화배우로 활동.

 

신이철(申二哲) — 서라벌고교 16회. 심검도 시범 주역. 이후 목사로 활동.

 

이두용 감독 —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전성기 감독. 미국 재미동포 한용철 주역 영화 다수 연출.

 

김원우 사장 — 영진영화사 작가 겸 사장. '달빛 자루기' 기획.

 

김정호(金正鎬) 총재 — 서라벌고교 16회. 심검도 시범 주역. 1981년 나한일에게 기천문 소개. 1982년 해동검도 창시. 이 연재의 구술자.

 

다음 회 → 제7회 — "설악산에 수련터가 있다"던 기천문 박대양 문주는 왜 끝내 그 길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서초동 도장 명의 분쟁, 그리고 3천만 원을 둘러싼 인간극장. 「기천문(氣天門)의 비밀 — 설악산에 없던 수련터, 그래도 길이 열렸다」

 

※ 이 글은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의 구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인물의 경력과 사건 경위는 구술자의 기억과 제보에 근거하며, 각 회차는 김정호 총재의 사전 확인을 거쳐 게재합니다.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부분은 향후 보완 예정입니다. 아울러, 등장 인물 중 일부는 당사자의 요청 또는 편집상의 필요에 따라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음을 밝힙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