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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만신창이의 나라가 되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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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역사, 사람 그리고 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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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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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2017/07/05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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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중국이 어쩌다 이런 만신창이의 나라가 되었단 말인가? 대지에 안주하여 소규모의 농산물을 위주로 하는 내륙문명으로서의 중국문명은 지중해에서 발원하여 태평양을 석권한 현대 서구문명의 충격 아래에서 이미 문화창조의 활력을 잃었으며, 심지어는 안신입명의 근거조차 잃고 말았다. 근대 중국인이 맞닥뜨린 무수한 재난은 기실 중국문명에 대한 역사의 무정한 조롱이다. 《하상》은 단지 중국문명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지구상의 모든 농업문명이 해양문명의 도전 아래 이미 해체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해내려는 것이다. 중국의 운명은 단지 역사의 전환과정 중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진통일 따름이다.
근 1백 년 이래로, 중화민족의 자손은 굴욕 속에 몸부림쳐 왔으며, 좌절 속에 헤어나지 못했고, 이산의 슬픔 속에 울부짖었으며, 한을 품고 죽거나 구차하게 삶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크고 굳센 역량을 갖추고서, 이 민족을 왜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는단 말이냐? 또 강인하고 굽힐 줄 모르는 영혼을 지니고서, 자신들의 국토 산하에 대한 애정과 민족 운명에 대한 관심을 왜 새로운 세대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있단 말이냐? 가령 중국문명이 해양문명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바다를 정복하여 자발적으로 참신한 해양문명으로 전환하였다면, 벗어날 수 없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운명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황하의 색을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피부색도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중국인의 문화적 심리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장차 어렵고 복잡한 문화‧철학의 계통을 수립하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우환의 무거운 짐을 두 어깨로 짊어지도록 하자! 그것은 우리 자손 만대가 다시는 우환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황하는 만리를 가르고 마침내 대해로 흘러든다. 20세기말, 그리고 21세기. 개혁의 거센 바람이 눈앞에 불어닥치고 있으니, 우리는 장차 어떠한 용기와 담력과 식견, 그리고 반성의식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하상》을 제작하는 본래의 취지이다.
용의 후예들아! 황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우리 선조에게 다 주어버렸다. 우리 선조가 창조한 문명을 황하가 다시 낳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창조해내야 하는 것은 참신한 문명이다. 그것이 다시 황하에서 흘러나오기는 불가능하다. 낡은 문명의 침전물이 이미 황하의 퇴적된 모래와 같이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가라앉아 쌓여있다. 이것은 대홍수로 한 차례 씻어버려야 한다. 이 대홍수가 밀어닥칠 시기가 왔다.
1988년 6월 12일부터 중국 중앙TV를 통해 전국으로 방영된 6부작 다큐멘터리 《河殤》의 해설사 중 일부다. 29년이 지났지만 다시 읽고 읽어도 가슴이 뛴다. 그때 나 역시 한창 피 끓는 30대. 나는 이 책에서 ‘중국’을 ‘한국’으로, ‘황하’를 ‘반도’로 읽었다. 그리고 한 가지 열망을 품었었다. ‘그래! 언젠가는 우리도…!’
중국문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河殤》은 중국의 현대화와 개방화 추진 1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계획과 추진을 위한 정신무장을 위한 인민 계몽용으로 CCTV가 제작 방영한 대형 다큐멘터리다. 젊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중국의 낡은 문명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출로를 모색한 작품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전통을 무시한 채 인민의 각성과 적극적인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헌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만 너무 잘 만들어버렸다. 천지를 뒤흔든 충격으로 천년 동안 잠자던 용을 그만 소스라치게 깨어나게 한 것이다. 너무도 놀란 전국의 시청자들의 재방영 요구가 빗발쳤고, 《인민일보》《광명일보》《청년보》등 거의 모든 언론 잡지에서 앞 다투어 지면을 대폭 할애하기 시작하였다. 상해와 심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중앙의 금지령을 어기고 재방영을 하는가 하면 《河殤》의 해설문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녹화 테이프까지 팔매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반향은 곧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심각한 논쟁으로 불이 붙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급기야 국무원에서는 《河殤》의 재방영을 중지시키고 필름의 해외반출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불길은 홍콩과 대만으로 옮겨 붙어 더욱 강렬한 ‘문화열’로 타올라 해를 넘기고도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천안문 사태로 터져버린 《河殤》 열기
89년 봄, 역자인 홍희 선생(당시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석사과정)이 《河殤》이란 책과 테이프를 들고 와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을 해댔다. 방송용 원고가 무슨 책이 될까 싶었지만 출판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별로 그럴듯한 원고를 잡지 못한 때라 홍선생의 말만 듣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판 경험도 없는 왕초보 사장인지라 교정을 볼 능력은 없고, 해서 인화지 출력이 나오면 그걸 대지에 풀로 붙이는 작업을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원고량이 너무 적어 《河殤》에 관한 비평문을 모아 싣고, 그래도 부족한 듯해서 저자 소효강(蘇曉康)의 중국 교육에 대한 평론 《신성우사록(神聖憂思錄)》까지 부록하였다. 다시 일본 간다(神田) 헌책방에서 수집해온 중국유물전 도록에서 몇 장의 유물 사진을 찢어 원색으로 추가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이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외국의 어떤 책이든 저자의 허락 없이 아무나 낼 수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의 책도 먼저 번역해서 내는 출판사가 임자였다. 그러니 《河殤》도 국내 다른 출판사에서 만들고 있을지 모르니 대충 서둘러 펴내야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잘 만들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판단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어라! 89년 6월 3,4일 결국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세계는 깜짝 놀랐다. 《河殤》으로 잠을 깬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욕구가 1년 만에 터져버린 것이다. 《河殤》과 젊은 청년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자오쯔양(趙紫楊) 총리가 실각되고, 《河殤》의 제작진들과 참여한 철학자들도 구금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우리 출판사도 덩달아 바빠졌다. 7월 2일에 전국 서점에 책이 깔렸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
아, 다큐멘터리 하나가 세상을 이렇게 바꾸는구나! 책 한권이 별볼일없었던 한 출판인의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소문난 명작은 아니지만 이제 막 시작한 출판사의 사장에게 《河殤》은 나침판이 되어줬다. 그래, 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이지! 해서 이후 중국(대륙) 책을 번역 소개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아직 남들이 손을 대지 않은 분야여서 앞서갈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한국판 河殤’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사전 지식이라곤 정말이지 털끝만큼도 없이 시작한 출판이었지만, 막상 책을 서너 권 펴내고 나서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차, 내가 큰 실수를 하였구나! 출판 시장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다. 그냥 흰 종이라면 전 세계에 어디든지 수출 수입이 가능하겠지만 그 종이에 한글을 인쇄하는 순간 한국, 한국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영어라면 세계가 시장인데…!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이쿠, 이런 게 운명인가 보다…!
바로 그때 중국(대륙)이 보였다. 그래, 좋다! 언젠가는 중국도 개방이 되고 민주화 될 것이다! 그댄 중국에 가서 출판을 하는 거다! 중국 13억은 물론 전세계 화교들이 또 얼마냐! 딴에는 야무진 꿈을 품고, 제법 멀리 내다본다고 중국책을 앞장서서 펴내고 내친 김에 중국원서점까지 열었다. 당시에는 중국 저자들 허락없이 그냥 한국어판을 내도 상관없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저자들을 수소문해서 약간의 사례비(2백 달러. 당시 중국에서는 제법 큰 돈)를 드리고 한국어판 서문까지 받아 책을 냈다. 국교도 맺지 않아 저자를 찾는데 꽤 힘들었다. 심우성 선생님 덕분으로 알게 된 북경 민족출판사 편집장을 지낸 이도영(6.25 때 월북) 선생님이 그 일을 맡아주셨다. 전화를 가진 저자(교수)가 드문 때라 출판사를 통해 주소를 물어 일일이 편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외국에서 자신의 책이 나온다는 건 학자로선 더없이 영광된 일인데, 굳이 몰래 책을 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도 언젠가는 중국에서 출판을 할 텐데 그때 서로 만나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실제로 수교 후 그분들 대부분이 한국의 학회에 초청되거나 교환교수로 방한해 초기 한중학술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어쨌든 그렇게 10여년을 신나게 중국학술서를 펴냈다. 대신 대중교양서는 거의 펴내지 못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엄격한 사회주의 체재라 지금처럼 재미있고 다양한 책들이 나오지 않았다. 문학류도 이념적인 색채가 강해 한국에 소개하기가 불가능했다. 중국에선 그러지 않으면 출판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륙책을 펴내고, 수교 후 북경을 수차례 오가며 중국을 알게 되면서 다시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다. 아, 중국이 완전 민주화되기는 어렵겠구나! 사회주의 체제라 출판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공산당이 무너지지 않는 한 출판을 자유업으로 풀어줄 리가 없겠다! 더구나 외국인에게 출판을 개방한다는 건…!(지금도 중국에서 언론 출판 잡지는 개인은 물론 어지간한 공공기관에도 허락되지 않는다.) 해서 IMF 후 중국원서점도 닫고 대륙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는 프랑스로 눈길을 돌렸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꼬집은 적이 있는 ‘동문선이 서쪽으로 간 까닭’이다.
며칠 전, 박학에 다식하기론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친구 묵개(默介)처사 왈, ‘희망’의 ‘希’자는 ‘드물다’라는 의미로 ‘바라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것’ ‘이뤄지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이 곧 희망이란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아무렴 바란다고 모두 다 이뤄지리라곤 누가 생각하랴! 그 중 한 두 개만 이뤄져도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다. 하지만 아직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한국판 河殤’이다. 《半殤》이라 해야 하나? 다큐든 책이든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29년 동안 그런 원고를 기다리고 또 필자들을 부추기기도 해봤지만 관심이라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렇지만 나라꼴을 보면…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그런 문화 비평이 절실한데…!
▲ 북경에서 이도영 선생과 심우성 선생, 그리고 필자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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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숙제가 되다!
어쨌든 《河殤》은 내게 큰 용기를 주고 또 숙제도 안겨주었다. 그 숙제를 아직도 다 못 해내고 있지만 29년을 화두처럼 붙잡고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우리 문화를 《河殤》처럼 바라보는 비판적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출판을 하면서도 줄곧 전통무예에 천착하게 되었다. 출판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해서 2006년에 책을 한 권 직접 펴냈다. 《무덕(武德)-武의 문화, 武의 정신》이다. 감히 평하자면 덕(德)을 주제로 쓴 세계 최초의 책이다. 이 책 때문에 인터넷 신문에 칼럼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2014년, 와인대사 휴고 안을 만나 글로벌 매너를 주제로 한 책을 펴냈다. 《품격경영》(상/하)이다. 이 책 역시 세계 최초다. 직장예절, 에티켓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지만 매너(Manners)를 공개한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진즉에 이런 책이 영미권에서 나왔더라면 굳이 내가 쓸 필요가 없었을 터이다. 처세술을 내는 출판사들이 앞 다퉈 번역해냈을 것이니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河殤》 때문인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한국판 河殤’ 과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었던 거다. 아직도 그 화두를 내려놓지 못하고 이렇게 끄적거린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경천동지, 반도를 확 씻겨내는 작품 하나 건질 수 있겠지! 그럼, 그럼! 비록 뻥이라도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해! 꿈을 가져야해! 미천한 주제지만 그렇게 사는 거지!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만신창이의 나라가 되었단 말인가? 반도의 후예들아! 대홍수가 밀어닥칠 시기가 왔다. … 흠, 흠!”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천둥벽력이 요란하다! 29년 만에 다시 뒤적여 본 《河殤》! 천인요고(千人腰鼓)가 천지를 진동시킨다! 가슴을 치는 울림이 너무 좋다. 그나저나 홍희 교수는 뭣하시나! 언젠가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했던 일을 잊으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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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05 [14:55]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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