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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을 줘본 적이 있습니까?
3만 원짜리 장학금과 마음의 빛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0/12/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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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주필     © 한국무예신문

공공매체에 발표할 글을 쓸 때에 한참 망설이다가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네가 뭔데?’ ‘그러는 너는?’이라는 자문에 변명할 자신이 없을 때입니다. 이번 주제가 그렇습니다. 몇 날을 두고 머뭇거리다가 아무래도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 참질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예전에 펴낸 책에 쓴 필자의 글을 옮깁니다. 

 

히브리어에 ‘헤세드(hesed)’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단어로서, 계약에 대한 성실한 이행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던 낱말이었습니다만 성경적으로는 언약 이행과 그에 대한 보답, 인애, 인자, 긍휼, 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차별 없는 존중, 끝없는 관심, 신실함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지요.

 

지난날 대한민국은 근현대화 과정에서 선진국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교회나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더 많은 개인들, 얼굴도 모르는 평범한 시민들의 도네이션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적지않았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고, 보답도 바라지 않는 후원이었지요. 그리하여 그들 대부분이 잘살게 되고, 선한 리더로서 국가나 사회를 위해 쓰임받기도 하고, 또 자기가 받은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베풀거나 봉사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선한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을 터입니다. 

 

요즈음 한국인들도 과거의 대한민국처럼 어렵게 사는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활발하게 합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 친구는 자녀가 넷인데, 과외도 제대로 시키지 못할 만큼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각자가 한 명씩에게 매달 일정액을 보내는 도네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용돈에서 빠져나가는 거지요. 일 년에 한두 번쯤 보내오는 편지와 사진을 통해 어쩌면 평생토록 가보지도 못할 그런 머나먼 어느 나라의 아이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나갈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나라의 아이들이 학업을 어려움 없이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 큰아이 둘은 독립해 나가서도 자기 몫을 챙겨 꾸준히 보내고 있다 합니다. 작은 것을 통해 헤세드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후원을 약정해 놓고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그만두는 이들도 꽤 있는 듯합니다. 베풀어 준들 정말 고마운 줄 알까? 언제까지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선의를 이용해 딴짓하는 건 아닌지? 몇만 원밖에 안 되지만 보낸 돈이 고스란히 그 아이를 위해 사용되는지? 착한 아이인지, 불량한 아이인지? 크리스천인지 이슬람교도인지 불교도인지? 내가 혹시 헛짓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요즈음 나도 궁한 처지인데 그만둘까? 등등 불쑥불쑥 회의가 밀려들 때도 있겠지요.

 

혹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노라 언약해 놓고서 아직 실천하지 않고 있거나, 중도에 포기한 적은 없는지요? 또 성경에는 ‘신실하라(sincere, sincerely)’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크리스천이 갖춰야 할 덕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신실함이 아닐까요? 아무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만을 말하는 건 아니지요. 크리스천끼리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요. 

                                 (신성대‧안경환 공저 《크리스천 매너》중에서)

 

 

앞서의 친구는 그렇게 10여 년이 넘도록 월드비전을 통해 도네이션을 해오고 있답니다. 한 명당 매월 3만 원씩! 어쩌면 적은 돈일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여러 아이들이 학업을 무사히 마쳤고, 또 더러는 그 가정까지도 재정적인 자립을 하는 가슴 벅찬 기쁨도 있었다 합니다. 처음의 아이가 약속된 학업을 마치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아이와 연결되어 그 고리를 이어나가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용돈에서 나간다지만 결국은 생활비에서 나가는 것일 테지요. 이래저래 살림이 곤궁해지고 삶이 팍팍할 때에는 모든 게 암울해져서 그만 그 고리를 끊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마저 끊어 버리면 그 아이들의 학업에, 그 아이들의 꿈들에 돌이킬 수 없는 지장을 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져먹게 된다고 합니다.

 

요즈음 서울 전월세 폭등으로 난리지요. 예의 친구도 서울에서 못 버티고 경기도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월드비전에서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도네이션의 중단을 알리며, 그동안 감사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난데없는 통고에 놀라 전화를 해서 알아보니 자동이체 계좌가 소멸되어 도네이션 의사가 없는 줄로 알고서 관계를 정리했다는 날벼락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이사를 하는 와중에 중학생 막내의 전학으로 이전에 사용해 온 스쿨뱅킹 통장을 정리하고 새로이 바꾸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고였습니다.

 

해서 새 통장으로 자동이체를 개설하여 재개하려니 이제까지 이어져 온 아이들과 다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참담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중도에 이렇게 도네이션이 중단되면, 그 아이들의 순서가 맨 뒤로 밀려나서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네이션을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졸지에 도움의 손길이 끊겨 난처해졌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아팠답니다. 평소에도 그 아이들이 보내준 감사 엽서와 사진을 두고 하나님께 그 아이들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사는 기도를 빠트리지 않았는데,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자책에 월드비전 직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여 어렵사리 예의 아이들과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여 들었지요. 하여 그 아이들을 위한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합니다.  

▲ 자료사진: 월드비전     © 한국무예신문


마음의 빚, 마음의 빛

 

44년 전 역무원 몰래 550원짜리 기차표를 훔친 한 여성이 1천 배로 갚은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5월 15일, 구미역에 “오랫동안 양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데 갚게 되어 다행”이라는 편지와 현금 55만 원이 든 봉투가 배달되었습니다. 편지에는 “44년 전 여고생 시절 (경북 김천) 대신역에서 김천역까지 통학하던 중, 역무원 몰래 550원짜리 정기권 1장을 더 가져갔다”는 사연이 적혔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학창 시절 빌려 가서 돌려주지 않았던 도서관 책을 수십 년이 지나 되돌려 주거나 변상하는 일도 있었지요. 사는 형편이 많이 나아졌는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어린 시절이나 어려운 환경에서 저질렀던 사소하거나 고의적인 실수로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지요? 무임승차를 하거나 실수로라도 공공기물을 훼손한 적은 없는가요? 그런가 하면 자신이나 주변에서 행해졌던 불합리나 모순에 대해 모른 척 외면했던 일, 마땅히 도와주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해 못내 미안했던 기억 등등 평생토록 마음에 걸리는 일 몇 개쯤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 전 언론에 소개된 또 다른 사연입니다. 어떤 분이 대구의 한 학교에 64년 전에 잘못 받았던 장학금을 돌려줬다는 내용입니다. 피난 시절 가난해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한 선교사가 목사의 자녀에게 전달해 달라고 맡긴 장학금을 담임선생이 군목(軍牧)과 군속(軍屬)을 착각해서 자신에게 줬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학생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장학금으로 무사히 졸업을 하고 서울대를 나와 자수성가를 했다고 하는데, 그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해서 당시 받았던 장학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300만 원을 모교 계좌로 부쳤다는 소식입니다. 

 

굳이 미담이라 말할 순 없으나 위 두 가지는 모두 가난하고 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반성하고 원상복귀 시킨 사례로 자기완성을 해낸 용기에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차표와 장학금은 상당히 다른 성격입니다. 전자는 무임승차 공금을 돌려준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나면 끝날 수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국영기업의 수익에 손해를 끼치고 개인적인 약간의 이익을 취한 것뿐이지요. 그렇지만 후자의 장학금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져야 할 혜택을 자신이 가로챈 꼴이지요. 그로 인해 불특정 어느 개인의 삶에 짐작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만약 당시 교사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본인의 인생은 어찌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장학금을 원래 받아야 할 다른 학생이 받았다면 그 인생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단순히 현재의 가치로 환산해서 학교로 되돌려주고 마음의 짐을 더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마도 그분은 부정하게 장학금을 받은 사실 자체에 대해서만 평생 가슴앓이를 했나 봅니다. 이왕지사 장학금의 본디 뜻을 헤아렸었다면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마음의 짐을 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도네이션을 하는가?

 

흔히 도네이션이나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한 감상을 물으면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위안 받아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예, 분명 그럴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는 “내가 받은 혜택을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렴 지당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장학금 같은 걸 받아 보지 못하고 공부도 남만큼 못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은 “머리는 좋은데 나같이 가난해서 학업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도 합니다. 또 어떤 상당한 재력의 기업가는 큰돈을 내놓고 장학재단까지 만들어 “인재를 육성해서 노벨상을 받게 하겠다!”는 대단한 포부를 밝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는 그 목적이 다양한 장학금이 많습니다만 기실 필자는 장학금을 한 번도 받아 본 적도 줘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참에 내가 만약 장학금을 준다면 어떤 사람에게 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엊그제 외국 드라마에서 본 장면입니다.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온갖 사소한 일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는 주인공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남을 돕느냐고? 그랬더니 대답하길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지!”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필자도 아, 그렇지 하고 크게 깨쳤습니다. 그렇지요! 돕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요즈음 아빠찬스 엄마찬스로 세평에 오르내리는 한 세도가의 자녀가 장학금까지 받았다는 것 때문에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아 본 한국인들 중에는 그 고마움에 대해 별생각을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공부를 잘해서 당연히 받았을 뿐으로 계속 공부를 잘하고 잘살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장학금을 우승 메달이나 상금쯤으로 알고 있는 거지요. 고마움을 가지는 사람 중에도 그저 고마워하기만 할 뿐 달리 그 갚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노예근성이지요. 물론 장학금을 준 사람도 어떤 보답을 바라지는 않겠지요.

 

장학금이든 자선금이든 도네이션에는 그 본디 뜻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도네이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장학금을 받았을 때 그 뜻을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물론 목적성이 있는 장학금이야 그 목적에 맞는 학생을 골라서 줄 것이니 굳이 그런 것 따질 필요조차 없겠지요.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장학금을 내놓은 사람도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도울 수 있어서 돕는’ 그것에 아무런 뜻이 없을까요?

 

도네이션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도움을 받음으로써 그 마음을 받는 겁니다. 어떤 이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달마다 아낀 3만 원으로 평생 만나지도 못할 누군가를 돕습니다. 또 어떤 이는 넉넉해서 한꺼번에 수천억 원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되겠지요. 매달 3만 원으로 학업을 마친 먼 나라 미개국의 아이와 수백만 원을 받았지만 굳이 그 돈이 없어도 학업을 마칠 수 있는 부유한 나라의 똑똑한 아이의 고마움의 무게를 어찌 계량해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간혹 장학금 받았다고 자랑하며 한턱 쏘는 사람도 봅니다. 그가 가지는 고마움의 무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자랑의 무게보다는 덜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은 정말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홍익인간이라 자부해 왔습니다. 진정으로 널리 인간을 위하려면 이전과는 달리 마음을 좀 더 깊이 써야 하고, 시야를 보다 넓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몇만 원에 불과하지만 그 돈을 보내면서 그 아이가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빠트리지 않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담지 못하면,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그 마음까지 가져가지 못하면 많든 적든 그 돈은 그저 공돈일 뿐입니다. 주는 이나 받는 이나 공돈으로 무슨 공(功)을 이루겠습니까? 노예근성으로는 그 마음이 안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Sincerely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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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16 [22:50]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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