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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심천고(丹心千古)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5/2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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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     © 한국무예신문
양계성(楊繼盛, 1516~1555)은 명대의 유명한 간관으로 자를 중방(仲芳), 호를 초산(椒山)이라 했다. 모친이 일찍 사망해 아버지가 재취했다. 계모는 그에게 소를 기르게 했다. 계성은 아이들이 서당에서 글을 읽는 것이 부러웠다.
 
형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어리다고 반대했다. 계성은 소도 기르는데 공부를 못하겠느냐고 말했다. 형이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소를 기르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13세에 공부를 시작해 향시에 합격하자 국자감에서 그를 본 서계(徐階)가 칭찬했다. 1547년에 진사가 되어 남경이부주사로 임명됐다. 남경이부상서 한방기(韓邦奇)에게 음악을 배워 대성하자 명성이 높아졌다. 35세에 북경으로 옮겨 병부원외랑으로 임명됐다.
 
몽고의 알탄칸이 북변을 침공하자 대장군 구란(仇鸞)이 마시(馬市)를 열고 화친하자고 건의했다. 양계성은 10가지 불가함과 5가지 잘못을 지적하는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세종 주후총(朱厚熜)은 구란, 성국공(成國公) 주희충(朱希忠), 대학사 엄숭(嚴嵩), 서계, 여본(呂本), 병부상서 조금(趙錦), 시랑 섭표(聶豹), 장시철(張時徹)과 함께 토론하게 했다. 구란은 어린 녀석이 적의 피해를 모르니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이 주저하자 구란은 궁으로 들어가 몰래 보고했다. 양계성은 하옥됐다가 적도전사(狄道典事)로 좌천됐다.
 
적도에는 이민족과 한족이 섞여서 살았으며, 문화가 낙후돼 독서를 알지 못했다. 계성은 학교를 세우고, 물길을 만들었으며, 광산을 개발했다. 부인 장정(張貞)은 방직기술을 가르쳤다. 현지인들은 그를 ‘양부(楊父)’라고 불렀다. 1년 후 알탄칸이 재침하자 마시가 완전히 파괴됐다. 세종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여 남경호부주사, 형부원외랑으로 전임시켰다.
 
엄숭이 집권했다. 그의 당원이었던 구란은 자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양계성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양계성은 구란보다 엄숭이 더 미웠다. 좌천됐던 1년 동안에 4번이나 전근했지만, 나라에 대한 보은을 잊지 않았다. 엄숭에 대한 탄핵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3일 후에 ‘청주적신소(請誅賊臣疏)’를 완성해 엄숭의 5가지 간사함과 10가지 대죄를 탄핵했다.
 
엄숭은 성지를 위조해 그를 사형수의 옥에 넣고 100대나 매를 때렸다. 동료가 뱀의 간을 보내며 먹으면 통증이 멈출 것이라고 했다. 양계성은 나에게도 간이 있는데 왜 뱀의 간을 먹느냐고 거절했다. 그는 스스로 썩은 살 3근과 끊어진 근육 2가닥을 잘랐다. 엄숭이 계성을 죽이려고 했지만, 육병(陸炳) 등의 보호를 받으며 옥중에서 3년 동안 지냈다.
 
가정 34년, 엄숭은 심복 조문화(趙文華)가 보낸 장경(張經) 등에 대한 죄를 논하는 주소에 양계성의 이름을 넣었다. 세종은 처형에 동의한 셈이 되고 말았다. 10월에 엄숭은 형부상서 하오(何鰲)에게 양계성 등 9명을 처형하고 기시하라고 지시했다. 계성은 처형되기 전 직접 쓴 연보를 아들에게 주고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지었다.
 
호기환태허(浩氣還太虛), 단심조천고(丹心照千古). 
생전미료사(生前未了事), 유여후인보(留與後人補).
호탕한 기세는 태허와 같고
붉은 마음은 천고에 비치리.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
뒷사람이 채우라고 남겨두려네.
 
세상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 시를 외웠다. 그의 아내는 얼마 후에 남편을 따라 자결했다. 사람들은 그의 고택을 사당으로 개조해 제사를 모시고 성황(城隍)으로 존경했다. 아내도 배향했다. 나중에 직예의 감찰어사 학걸(郝杰)의 요청에 따라 사당을 정충사(旌忠祠)로 바꾸고 2개의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각각 구란을 탄핵한 ‘파마시소(罷馬市疏)’와 엄숭을 탄핵한 ‘핵엄숭소(劾嚴嵩疏)’를 새겼다. 순치, 강희, 건륭 등 청의 황제들도 그의 사당에 친필로 휘호와 시를 남겼다. 간신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기개는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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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5/24 [22:26]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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