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편집 2024.04.20 [09:08]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섹션이미지
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공지사항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개인보호정책
청소년보호정책
기사제보
HOME > 칼럼 > 역사산책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천고마비(天高馬肥)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8/16 [06:47]
광고
▲ 묵개 서상욱     © 한국무예신문
중국 북방에 인접했던 소수민족은 진의 통일 전 동호, 흉노, 월지(月氏) 등 삼대민족으로 융합됐다. 그 가운데 몽고고원에 거주하던 흉노가 가장 강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동안 흉노도 일세의 영웅 두만(頭曼)을 중심으로 주위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병합했다. 이동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유목민족은 평소에도 군대처럼 조직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남북으로 이동했다.
 
유목민족끼리의 전쟁이나 남방 농경민족과의 투쟁에서 밀렸을 경우에는 동서로도 이동했다. 최고통치자인 선우는 가을에 호구와 가축의 수를 확인하기 위해 부족을 집결시켰다. 긴 겨울이 되기 전 선우는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천고마비라는 풍요와 낭만적 용어는 가을마다 계속된 북방민족의 침입을 경계하는 의미였다. 유목민족은 가을마다 예고도 없이 농경지역으로 남하하여 필요한 물자와 포로를 잡아 전광석화처럼 물러났다. 추격을 받으면 사막이나 초원으로 유인하여 활로 공격했다. 그들은 추격자가 지칠 때까지 절대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뛰어난 기동력과 궁술은 추격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진의 통일 이전부터 진, 조, 연 등의 세 나라는 오랫동안 흉노의 침입을 받아왔다.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끊임없이 수도로 이어졌다. 조의 명장 이목이 지키던 대군(代郡) 일대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흉노를 막지 못했다. 각국은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수축했지만 소극적인 대책에 불과했다.
 
흉노의 목표는 영토점령이 아니었다. 농경민족에게는 토지가 중요했지만, 유목민족에게는 생활물자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중국인들에게 흉노는 수비의 대상이었지만, 영토와 인구를 확보하기 위한 내전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러나 통일이 완성된 이상 소극적일 수는 없었다.
 
통일제국의 황제이자 상제와 동격인 진시황은 전통과 혈통을 중시하는 화족들로부터 이민족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비판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도 이민족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방사 노생(盧生)이 올린 ‘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라는 참언이 진시황의 적극적인 흉노정책을 이끌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진시황이 흉노제압대책을 수립한 것은 사실이다. 이 참언은 훗날 진이세로 등극한 진시황의 아들 호해(胡亥)를 가리킨 것으로 판명됐다고 하여 오히려 신빙성이 약한 조작으로 인식된다.
 
BC 215년, 몽념(蒙恬)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다. 기습을 받은 하투의 흉노족은 쉽게 무너졌다. 이듬해 봄, 진의 주력부대는 황하를 건너 낭산산맥까지 진출했다. 흉노는 북방으로 도주했다. 후방의 영토를 다지기 위해 몽념은 장성을 수축했다.
 
후대에 만리장성이라 부를 이 공사는 지금의 감숙성 임조현인 고궐에서 출발해 오르도스를 휘감고 흐르는 황하를 건너 황량한 내몽고를 지나 춥고 삭막한 요동에서 끝났다.
 
만리장성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북방의 약탈자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줄리아 로벨은 중국인이 북방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구축한 공격시설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이 북방민족을 포함한 이민족을 터무니없이 거칠고 호전적인 침략자라고 규정한 배경에는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 도사리고 있다. 장성건설의 다른 이유는 통일제국 건설 후 불필요한 군대와 불만세력을 흡수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의 아들 부소(扶蘇)는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만류하다가 북방 변경으로 축출됐다.
 
진시황은 가장 총애하던 몽념에게 북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맡기는 동시에 통일제국이 안고 있던 모순까지 해결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심리적으로 만리장성처럼 믿고 싶은 사드는 공격용일까 방어용일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기사입력: 2016/08/16 [06:47]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미인계고(美人計考)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8/04/18/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진송예찬(秦松禮讚)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8/02/18/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상산사호(商山四皓)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8/01/21/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임기소고(臨沂小考)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8/01/15/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어부지리(漁父之利)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8/01/08/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부저추신(釜底抽薪)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2/22/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권력장악(權力掌握)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2/15/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양명평란(陽明平亂)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2/14/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지연전술(遲延戰術)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2/04/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차조외력(借助外力)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1/29/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오기일패(吳起一敗)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1/29/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차도살인(借刀殺人)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1/29/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백련교도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1/29/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출기제승(出奇制勝)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0/27/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포슬장소(抱膝長嘯)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10/10/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묵가오류(墨家誤謬)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09/29/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서호십경(西湖十景)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09/20/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전쟁철학(戰爭哲學)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09/20/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구자소고(苟字小考)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09/20/
[서상욱의 역사산책] [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제지도(兄弟之道)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2017/08/31/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개인보호정책청소년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