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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씨름 어디로 갔는가?
씨름의 품격론(品格論)
 
신성대 전통무예연구가(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기사입력  2012/04/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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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주필     ©한국무예신문
고대올림픽이든 근대올림픽이든 모두 전쟁의 끔찍함에 진저리치면서 생겨난 순화된 전쟁놀이이다. 오늘날 전쟁이 인간사회에서 점점 사라져 가면서, 상대적으로 격한 스포츠에 대한 갈구가 심화되고 있다. 폭력의 부재가 또 다른 폭력, 혹은 그 대용품을 찾는 것이다. 해서 폭력적인 게임이 범람을 하고 잔인한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배설구를 찾지 못한 인간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이 그렇게 폭발하는 것이다. 해서 보다 격렬하고 잔인한 격투기가 날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씨름이란 무엇인가?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물은 살아남아 종(種)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어떤 형태로든 경쟁을 멈출 수 없다. 특히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힘자랑에 들어간다. 인간 역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수 억 년을 서로 겨루며 진화해 왔을 테지만, 문화적인 특징을 지닌 힘자랑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경(詩經)》에는 "주먹도 없고 용기도 없으면, 직위는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단서가 된다(無拳無勇, 職位亂階)"라고 하여, 이미 권술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수박(手搏)과 함께 '각력(角力)' '각저희(角抵戱)'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비로소 고대 스포츠의 초보적 형태인 공연적 대련의 내용을 갖추었다 하겠다. 진시황은 각저를 좋아하여 크게 흥성케 하였는데, 다른 여러 놀이 종목과 함께 이를 '백희(百戱)'라 칭하였다. 한당(漢唐)시대에는 궁정은 물론 민간에까지 각저백희가 성행하였는데, 한(漢) 화상전(畵像塼)이나 고분벽화 등에 그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한당(漢唐) 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 역시 고분 벽화에 각저와 수박의 그림이 하나씩 남겼다. 이 두 그림은 씨름뿐만이 아니라 태권도와 택견 등 모든 전통 무예가 서로 자신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어찌 고구려뿐이었겠는가. 당시 중국 문화를 경쟁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제와 신라에서도 널리 퍼졌을 것이다. 이 두 그림 중 각저 그림이 지금의 씨름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각저도가 반드시 우리 씨름의 기원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고분 주인의 신분이 매우 높은 걸로 비추어서 분명 당시 유행하던 군인(무인)들의 '각저희'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기원이 무예의 기초 수련으로서의 각저이든, 아니면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던 민속놀이로서의 힘자랑이든 씨름은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민속놀이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무기 없이 맨몸으로 치고받으며 노는 놀이의 형태가 거의 유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만 경기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재 이웃 나라인 일본과 몽골에도 씨름이 남아 성행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몇몇 소수민족 민속놀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고대에는 각저나 수박 등이 크게 성행하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보다 체계화된 권법(권술)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 자료이미지. 청(淸)대의 세한도(부분).  그림설명 - 궁중에서는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이같은 수박희나 각저희를 자주 열었었다.     © 한국무예신문
 
원(元)나라에서 들어온 씨름?
 
우리나라 씨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데, 고려 충혜왕(1315-1344)은 정무를 신하들에게 맡기고서 환관들과 씨름(각력, 각저)을 즐겨 조정의 예를 무너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충혜왕은 1328년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이때 원나라 우승상(右丞相) 연첩목아(燕帖木兒)의 총애를 받아 1330년 고려왕에 오른다. 1332년 왕위에서 쫓겨나 다시 원나라로 갔다가 1339년에 복위한 그는 협기가 있어 주색을 좋아하고, 놀이와 사냥에 심취했으며, 방탕하여 다른 사람의 처첩이 예쁘다는 소문만 들으면 강제로 끌어들여 취하기를 일삼았다고 하며, 후궁이 1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 다시 쫓겨나 원으로 돌아가다가 죽었다. 원에 볼모로 가 있던 동안 못된 건 다 배웠던 모양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있는 씨름의 형태가 어쩌면 원(元)의 풍습에서 비롯되었을는지도 모른다. 1백여 년 동안 원의 지배하에 있던 고려는 궁중이나 민간 할 것 없이 원의 제도와 풍습을 받아들였는데, 오늘날 우리 풍습 중 많은 것들이 이때 들어왔다고 한다. 씨름 역시 그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몽고의 씨름은 ‘쎌렘’이라 하였으며, 징기스칸이 병사들의 휴식시간에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한다. ‘씨름’과도 어원적으로 상통하고 있다. 물론 각저니 수박이니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맨손으로 겨루는 놀이가 그다지 크게 달랐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원의 지배하에 있는 동안 백성들이 무장 해제되어 무예를 할 수 없게 되자 그 대용품으로 씨름을 즐기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원(元)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씨름이 권장되고 성행했다고 국수적으로 미화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무예의 속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오히려 원의 풍속을 선호하였기에 생긴 종속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이나 귀족들이 앞 다퉈 오랑캐의 풍속을 따랐으니 백성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어느 민족이든 식민지배 초기엔 반발도 하지만 한 세대, 약 30년만 지나면 자포자기하게 되어 적극적으로 지배국에 동화되고자 하는 심리현상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씨름이 다시 부활하게 된 때도 일제 식민 치하에서였다. 1927년 조선씨름협회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으로 현대적 스포츠로 거듭나게 된다. 태권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가라테(空手道)가 1600년경 일본에 의해 무장 해제된 오키나와(沖繩)에서 발생했듯이, 한일 합방과 더불어 무장 해제되면서 십팔기가 사라지자 씨름이 부활된 것이다. 1936년에는 대한체육회에 가맹하면서 경기 체육으로 육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해방 직후까지 열광적인 호응을 얻던 씨름은 차츰 시들해져 가다가 1983년, 즉 군부 독재가 한창이던 5공 시절에 와서 다시 부활한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일으킨 민속부흥운동인 ‘國風’을 타고 '민속씨름대회'가 개최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한국 씨름과 비교되는 것은 가까운 일본의 '스모(相撲)'이다. 고대에는 각저(각력) 등으로 표기했었다. 지금은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고대에는 거의 흡사했을 것이다. 현재의 '스모'는 형태면에서는 다른 민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스모'는 서기 710-1185년까지 일본 황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국민적인 오락으로 발전하게 된다. 종래의 잔인한 구경거리가 고도의 격식을 갖춘 쓰러뜨리기 경기 방식으로 순화된 것이다. 그 후 무가시대(武家時代)에는 공개 시합을 금지하고, 사무라이를 위한 군대식 스모로 육성되기도 하였다. 1600년 이후 다시 공개 시합인 프로 스모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국기(國技)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매년 6개의 큰 대회가 열려 엄청난 관중을 끌어 모으며 수백 명의 직업 씨름꾼이 양성되고 있다.
 
‘씨름(角抵)’과 ‘스모(相搏)’
 
이제 씨름과 스모의 형식과 내용에서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먼저 일본의 스모는 등급 제도가 매우 복잡하지만, 한국의 씨름에는 원래 특별한 등급이나 그에 따른 호칭 없이 그냥 힘이 센 사람에게 붙이는 일반명사인 '장사'로 통칭했을 뿐이다. 1983년 민속씨름대회가 개최되면서 체급별 우승자에게 '천하장사'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이에 비해 스모는 체급 구분이 없으며, 제1인자를 '요코즈나(橫綱)'라고 부르며, 그 아래로 '오제키(大官)' 등 여러 등급과 그에 따른 호칭이 주어진다.
 
특이한 것은 우승했다고 해서 무조건 '요코즈나'의 호칭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차례의 우승을 거두고도 '요코즈나'에 등극하지 못하는 예도 있다. 선수의 실적과 경력, 그리고 품행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에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특히 외국인 선수에게는 이 호칭을 붙여주기를 꺼려 배타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등급과 호칭에 엄격한 이유는 독특한 일본 문화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사들의 여러 등급의 신분제도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스모는 경기 전후에 거행하는 의식이 길고 지루하며, 선수가 서로 겨루는 자세를 취하는 과정도 까다롭고 길다. 이 역시 궁중의 까다롭고 엄격한 의례(儀禮)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모 경기 관람은 이런 전통 문화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긴 의식과 수차례의 대치 끝에 막상 시합 자체는 순식간에 끝나 버리기에 스모는 지루하고 싱거운 경기라서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외국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의례 문화를 모르기 때문이다.
 
경기 운영 방식도 토너먼트 방식이 아닌 매일 번갈아 가면서 한 차례씩 단판 승부를 벌여 최고 승률을 거둔 두 사람이 최종 결전을 벌인다. 여기서도 두 선수의 승률과 등급에 따라 까다롭고 복잡한 규정이 적용된다. 전체적인 경기 운용 면에서 스모는 품격 높은 궁정의 의례와 멋을 받아들였으며, 승부의 결정에서는 무도(武道) 정신을 따르고 있다. 비록 힘자랑을 하는 볼거리 오락에 불과하지만 엄격한 무도 정신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우선 선수 개개인은 관중이나 심판 등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혀 절하는 법이 없다. 천하의 무사(장사)가 누구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는 것이다. 기예를 팔아먹고 사는 예인들이나, 혹은 시장의 장사꾼들이나 허리 굽혀 절하는 것이다. 무사란 오직 승자에게만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무사도(武士道)와 스모
 
▲ 자료사진. 일본 민속스포츠 '스모'     © 한국무예신문
그 다음, 선수에게는 무사로서의 대접이 따른다. 우선 시합을 위해 스모판 위로 올라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두 선수가 호흡을 고르고서 겨룰 자세를 취하는 동안 심판과 관중 모두는 선수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존중해 준다. 단번에 곧장 돌진해 승부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의 호흡이 맞지 않을 경우 여러 차례의 대치 자세를 똑같이 반복하는 바람에 기다리는 관중을 짜증나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심판이 이를 제지시켜 빨리 싸우도록 강요하는 법이 없다. 비록 씨름이지만 칼을 든 무사의 목숨을 건 승부로 보고 존중하는 것이다. 두 무사가 목숨을 두고 겨루는데, 옆에서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선수는 경기 중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선수로서(무사로서)의 예(禮)를 잃거나 품위가 떨어지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지거나 이기거나를 막론하고 감정적인 폭언이나 화난 몸짓은 물론 고약한 인상조차 금물이다. 입장에서 퇴장할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오직 승부에만 열중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억울하게 졌다 해도 그 자리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지 않는다. 졌으면 그 자리에 서서 고개 숙이고 물러나야 한다. 판정에 불복한다는 것은 곧 스모판을 떠난다는 뜻이다. 또한 스모꾼들은 경기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 십 수 년 전, 인기 선수 한 명이 당시 인기 절정의 연예인 미야자와 리에와 약혼을 했다가, 그녀의 누드집 발간 때문에 주위의 강요로 파혼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만큼 엄격한 품격을 요구한다.
 
이 스모 경기의 의례(儀禮)는 마지막 날 경기에서 새로운 우승자가 결정되고 났을 때 그 극치를 보여준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관중들 중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새로운 요코즈나(때로는 그냥 우승자)는 일단 퇴장한 후에 약 10여 분 동안 머리와 치장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다시 입장할 때에는 먼저 다른 모든 선수들을 앞세운 다음, 마지막으로 위풍당당하게 전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스모판에 오른다. 그가 자리를 정하면 나머지 선수들이 퇴장하고, 곧이어 시상식과 부상 수여식이 거행되는데, 인기 요코즈나의 경우 각계에서 주는 기념패와 부상이 줄을 잇는 바람에 이를 주고받는 의식에만 30분이 더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 일이 모두 끝난 후 요코즈나가 단을 내려가면 그때서야 관중들도 퇴장한다. 이 모든 것이 최고의 무사 요코즈나에 대한 예우이다.
 
긴장감 부족한 오락[戱]로서의 한국 씨름
 
▲ 자료사진. 한국 민속스포츠 '씨름'     © 한국무예신문
이에 비해 한국의 씨름은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인다. 우선 경기 전반에 걸쳐 어떤 엄숙한 의례(儀禮)의 멋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엎치락뒤치락 재미있고 호쾌한 승부만을 기대할 뿐이다. 요즘 들어 경기 전에 가수나 국악인을 동원해 분위기를 돋우기도 해보지만 그다지 신나 보이질 않는다. 경기도 단판 승부가 아닌 3판 양승 혹은 5판 3승제를 도입함으로써 긴박함(무예 승부다운)이 없고, 중간 중간 샅바 싸움에 주심이 반말로(천하장사에게?) 꾸지람을 하고 속히 겨룰 것을 강요한다. 경기 시간을 초과하면 그때까지의 승률과 체중으로 승부를 결정지어 버린다. 승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온 규정이다.
 
경기 도중 판정에 불복하거나 짜증 또는 화를 내며 모래판에 주저앉아 억지를 부리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다. 머리는 요란하게 노랑물을 들이고, 이기면 엉덩이를 천박하게 흔들며 요상한 댄스를 추거나 감독에게 달려가 안겨서 감격해하는 폼이 도무지 장사(무사라고는 할 수 없고)답지 못하고 경박스럽기 그지없다. 관중들의 매너도 흡사 개싸움이나 소싸움 구경하듯 해서 선수(장사)에 대한 예우나 경외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엎치락뒤치락해서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오락거리 정도로 여기며 깔깔대거나, 조금만 지루해지면 집어치우라고 고함을 쳐댄다.
 
최종판에서 우승자가 가려진 후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다. 천하장사가 모래판에 엎드려 사방의 관중들에게 큰절을 올린다. 자신이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신분은 그저 힘센 종놈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은 천하장사를 가마에 태우고 한 바퀴 돌리는데, 이 역시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격에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모양새다. 심하게 말하자면 종놈이 씨름에 우승했다고 정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냥 목말태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고대 한국의 씨름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의 씨름 형태로 유추해 보아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일본의 스모는 왕실의 의례와 무사 정신을 이어받아 전 세계에서 가장 격조 높은 국민 스포츠로 키워진 데 비해, 한국의 씨름은 하급의 민속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라는 토양에서 씨름은 일반 평민(농부)들의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는 놀이였다. 사대부집 자제들이 종놈들과 힘을 겨루었을 것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지 않은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명절날 부자가 내놓은 송아지 한 마리를 두고, 이 고을 저 고을 힘센 청년(아마도 대부분 종이나 머슴)들이 벌이는 힘자랑이었을 뿐이다. 만약 조선 왕조 전기 궁중에서 행해졌던 군사들의 각저희(角抵戱)가 지금의 씨름으로 전해져 왔더라면 민간에서 흘러온 현재의 씨름과는 뭔가 달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의 스모나 몽골의 부흐와 유사한 나름의 군례(軍禮)와 법식(法式), 그리고 절제미가 갖추어졌을 것이다. 아쉽게도 임진왜란 이후 궁중의 각저희와 수박희는 십팔기의 <권법>으로 대치되면서 사라져버리고 민간에서 흘러온 씨름과 택견만 남았다.
 
무덕(武德)이냐 오락성이냐
 
한 20여 년간 호황을 누리던 민속씨름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점점 시들어 가는 것이 안타까워 나름대로 무(武)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았다. 그동안 관중들의 눈치나 보면서 군사 정권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참여한 기업들의 후원으로 너무 안일하게 운영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 우리의 씨름이 앞으로 어떤 멋과 격식을 갖춰서 발전해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먼저 씨름의 문화적 배경부터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씨름이 그저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안일한 인식으로는 자고 나면 새로운 오락거리가 한두 개씩 생겨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한국의 씨름과 일본의 스모를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높고 낮고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스모는 스모대로, 씨름은 씨름대로 각각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민속놀이로서 있는 그대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비교를 통해 같은 놀이라 하더라도 무혼(武魂)이 살아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의 발전 양상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어찌 씨름뿐이겠는가. 다른 놀이는 물론 심지어 민족정신까지도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씨름이 다른 스포츠와 차별화 된, 단순한 오락적 가치 이상의 민족적 덕성(德性)을 지닌, 품격(品格)을 갖춘 민족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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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4/23 [18:05]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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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2012/05/17 [14:24] 수정 | 삭제
  • 태권도진흥법은 뭔데? 무예진흥법과 뭐가 같은데?
  • 동의 2012/05/11 [11:49] 수정 | 삭제
  • 씨름은 무예인데 오락이라고 생각하는 씨름꾼들부터 각성해야 한다. 씨름진흥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무예진흥법과 뭐가 다르다는건지.
  • 가다오다 2012/04/25 [16:08] 수정 | 삭제
  • 이 칼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전제의 오류이다.
    신성대는 무예란 군사의 기예이고, 그게 18기이며,
    따라서 맨손기예는 무예라고 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씨름을 그런 군사무술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쓰모와 단순 비교를 하면서 마치 스모는 우월하고
    씨름은 질적으로 낮다고 하는 그런 인식으로 칼럼을 쓴다는 것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 씨름이 2012/04/24 [20:26] 수정 | 삭제
  • 그래요. 씨름이 어디갔는지 안보입니다. 옛날처럼은 어려울 것같아요. ^^
  • 두심이 2012/04/24 [10:59] 수정 | 삭제
  •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명절날 부자가 내놓은 송아지 한 마리를 두고, 이 고을 저 고을 힘센 청년(아마도 대부분 종이나 머슴)들이 벌이는 힘자랑이었을 뿐이다. >만약 조선 왕조 전기 궁중에서 행해졌던 군사들의 각저희(角抵戱)가 지금의 씨름으로 전해져 왔더라면 민간에서 흘러온 현재의 씨름과는 뭔가 달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의 스모나 몽골의 부흐와 유사한 나름의 군례(軍禮)와 법식(法式), 그리고 절제미가 갖추어졌을 것이다.
  • 더한심한 2012/04/24 [10:05] 수정 | 삭제
  • 저런크럼 한심한 사람들때문에 문대성같은넘이 나온거지.
    비판과 헐뜯기를 구분도 못하니 ㅉㅉ.
    약이 쓰다고 뱉아?
    이 양반 글 아님 이신문에 왜 들어오남?
    X와 된장도 구분못하는 한심한분께서 나가심되겠네.
  • 한심한 2012/04/24 [09:44] 수정 | 삭제
  • 신성대씨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점검해보기를 권한다.
    사물은 음양과 장단과 정과 부가 공존하는 게 이치이다.
    그것을 어느 쪽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이겠지만,
    상대가 있을 때는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려면
    우선 예의를 갖추어 배려하는 태도부터 갖추어야 한다.

    그런게 武德일 것이다.

    무엇이든 가치 있는 쪽으로 보지않고 부정적인 면만 확대해석해서
    헐뜯기만을 일삼는 것은 불평분자의 소치일 뿐이다.
    이런 것은 근자에 말썽이 많은 일진꼬멩이들이거나
    시중의 양아치, 불량배들이나 하는 소행이다.

    신씨의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이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사람이 만사를 비뚤게만 볼 수가 있을까?
    그것도 대단한 공력이긴 하다.
    제 딴은 정의와 용기, 무덕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완전 착각이다.

    추측컨대,
    자신이 철없던 시절부터 오래 숭상해왔던 18기가 알고보니
    순전히 장꿰무술이었다는 데서 온 상실감이 지나치게 컸거나,
    또 신앙의 대상처럼 존경해마지 않던 스승이란 자가
    중국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이고,
    또 그 사람이 어느날 갑짜기 구한국군인으로부터 18기를 배웠다고
    거짓말하는 사이비 무술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나서,
    이른바 인지부조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우가 신포도를 나무라듯 하는 자신의 헛소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대꾸도 안해주니까
    남을 헐뜯는 것으로 자위하는 병적인 정신상태가 돼버린 게 아닌가 싶다.

    남을 비판할 때는 자신이 남을 비판할 수 있는 덕망과 식견이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약사에게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니
    무슨 약을 달라고하는 짓을 하면 안된다.
    설사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 자신하는 부분이라도
    전문분야에 대해 전문가의 견해나 전문가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혹 지적할 점이 있더라도 그 대상의 긍적적인 면이 크다면
    약점은 상쇄시켜 주는 아량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게 무덕이 아닐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수준의 식견으로
    그 분야 전문가들이 각고의 노력에 의해 이룬 긍정적인 성과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왜곡하고,
    부정적인 면만 침소봉대하여 그게 전부인양 독자를 오도하면 안된다.

    무릇 진심으로 무예계 발전을 위해 논의를 하려면 대상종목이나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먼저 지켜야 한다.
    그게 무덕을 존숭하는 무인의 태도일 것이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욕하고 견강부회적으로 폄훼해놓고
    건강한 발전을 위한 논쟁을 하자는 충심의 발로인양
    진정성을 가장하면 안된다.

    이런 글을 계속 연재하는 매체도 문제이다.
    매체가 이 따위 허접글을 지속적으로 실어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을 런지는 모르지만,
    결국 매체가 무예일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근본목적은 상실되고,
    지각있는 무예인사들이나
    욕먹은 종목들은 이 매체를 외면하고 적대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매체가 특정 무술종목의 대변지가 아니라면
    인지부조화 현상으로 보이는 글을 칼럼이랍시고 연재를 해서
    한국무예계를 망가뜨리는 이 따위 짓은 즉각 중단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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