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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북양해군(北洋海軍)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6/09/3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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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     © 한국무예신문
청왕조는 태평천국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건조하려고 했지만 90만냥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직접 현대식 군함 건조에 나섰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홍장(李鴻章)은 강남제조총국, 좌종당(左宗棠)은 복주선정국을 세워 군함을 건조했지만 낙후된 기술과 분산된 지휘체계 탓으로 고작 해안순시에 그쳤다.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략하자,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북양, 남양, 복건, 광서에 4개 해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복건과 남양해군이 전멸하자 외국에서 군함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마련한 60여척의 군함 가운데 비교적 성능이 뛰어난 것을 북양해군에 우선 배치했다.
 
이홍장은 위해, 대련, 천진을 중심으로 발해만에 삼각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북양해군을 키웠다. 정여창이 북양해군 제독으로 임명됐다.
 
1875년에서 1884년에 이르기까지 북양해군은 세계적 수준의 대소전함 25척을 보유하여 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1888년 이후 자희태후가 전비로 사용할 예산을 이화원(頤和園) 공사에 전용하면서 더 이상 전력을 키우지 못했다.
 
중국을 노리던 일본은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해군력을 강화했다. 1894년에 이르자 일본의 수군전력이 중국을 훨씬 추월했다.
 
위해 기지는 독일이 설계했다. 그러나 영국인 테일러는 일단 침입을 받아 사격을 하면 항구에 정박한 아군의 함대에 맞을 우려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결점은 위해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그대로 노출됐지만 당시에는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의 전함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군대를 싣고 가는 전함을 기습했다. 8월 1일 중일 양국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9월 17일 정여창은 북양함대를 이끌고 압록강 입구로 병력을 운송했다. 이 해전에 참가한 중국의 전함은 10척, 일본의 전함은 12척이었다.
 
평균속도는 중국전함 시속 15.5리, 일본전함 16.4리였다. 그러나 발사속도에서 일본전함이 중국전함을 훨씬 능가했다. 일본전함은 각종 구경의 속사포 93문을 장착했지만 중국전함에는 하나도 없었다.
 
양군의 승패는 그것으로 판가름이 됐다. 일본함대는 ‘일자진(一字陣)’을 펼치며 빠른 속도로 북양해군의 ‘인자진(人字陣)’을 양단했다. 탄약이 떨어지자 정세창은 최고속도로 일본의 선봉 요시노함에 부딪쳤다.
 
정세창의 전함에 타고 있던 200명 가운데 27명만 구조됐다. 바다에 떨어진 정세창은 구조를 거절하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후 5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가 북양해군의 포격을 받자 일본함대도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여순에 정박하고 있던 북양함대의 포함과 어뢰정이 출격하자 일본함대는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북양함대는 10여리를 추격하다가 회군했다. 이 전투는 4시간 40분 동안 진행됐으며, 북양해군은 5척의 전함과 800여명의 병력을 잃고 급격히 사기가 떨어졌다.
 
일본함대는 3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한 척의 전함도 잃지 않았다. 일본함대는 불과 3개월 후에 완전히 원상복구를 하고 전투력을 회복했다.
 
황해해전 이후 일본군은 여순을 점령했다.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명을 받아 수군과 육군이 서로 의지하면서 위해항을 지키며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일본군은 산동작전군단을 편성하고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1895년 1월 20일 새벽 영성만에 상륙했다. 오후에 영성이 점령되자 청군은 도주했다. 25일 일본군의 위해 공격이 시작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청군의 일부가 다시 도주했다. 유공도를 지키던 제독 정여창은 자살했다. 2월 17일 일본군 연합함대가 항구로 들어와 항복을 받았다.
 
청군은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전함 11척과 엄청난 물자를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북양해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120년 전에 일본은 이미 이러한 군사력을 지녔다. 그러한 일본이 다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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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9/30 [06:02]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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