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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2)
합기도의 근대무예사 정립을 위한 2가지 전제조건(1)
 
이호철 박사 기사입력  2015/07/15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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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철 박사   © 한국무예신문
최용술은 과연 다케다 소우가꾸로부터 대동류유술을 배웠는가?
 
 최용술이 대동류유술을 다케다 소우가꾸로부터 정식적으로 배웠는가 아닌가 하는 논제(論題)는, 한국의 근대무예로서의 합기도가 최용술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에 제자를 양성(養成)하고 합기도를 형성(形成)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觀點)이 된다.
 
왜냐하면 대동류유술과 고대 한국의 신라시대 관련설에 관해서 최종균, 이성진과 김의영, 황종대와 김동규 등과 같은 무예학자들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주장(主張)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동류유술은 발생 시기는 700여년 이전인 일본의 겐지시대와 헤이케(평가)시대로 본다. 최초의 대동류유술의 기록은 천황가의 6대손인 경기공이라는 사람이 미나모투라고 하는 성을 하사 받아 자신의 미나모토 가문에서만 비밀리 창안(創案)돼 전하는 가전(家傳) 비술(秘術)이라 서술하고 있다.
 
이 가전 비술을 합기의 이치를 체현(體現)하는 과정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헤이안의 지식인인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으로 전쟁에서 큰 전공(戰功)을 세운 보상으로 다께다(武田)라고 하는 성씨를 하사(下賜)받았다. 삼랑이라는 성씨는 신라의 성으로 삼랑원의광은 청화원씨이고 이름은 의광이다. 1045년부터 1127년까지 일본에 생존했던 인물로서 일본 역사는 그를 신라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쿄토 시가현의 오쓰시(五률市)에 있는 원성사에 신라 성신당이란 산신각이 있고 그 뒤에 있는 숲 속에 삼랑원의광의 묘소형식도 신라시대의 형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反論)으로, 의광은 관동지역 개척을 위하고 전승기원을 위해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에 원복(元服), 즉 무사가 전쟁터를 향하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작법(作法)을 올리기 위해 단지 신라삼광이라는 호명(呼名)을 붙였다고 주장한다. 일본 최초 유술파인 다케우찌파도 그 기원을 미나모토에 두고 있고, 일본 최초의 무사작법인 오가사와라도 미나모토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의광이 신라명신 앞에서의 원복을 신라로부터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본무도를 연구한 최종균의 주장이다.
 
이러한 대동류유술의 한국무예와의 연계성에 관한 연구들의 사료들을 보는 역사가들의 시각적인 차이점과 결정적인 고증학적인 자료들의 부재로 인해서 대동류유술의 뿌리가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여전히 논쟁중이다.
 
실증사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우선 삼국시대의 무예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신라시대에는 화랑도(花郞徒)의 검술(劍術)이 궁술(弓術)과 함께 무예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찌르는 검법이 아니고 베는 검법의 추정만 할 뿐 합기술과 동작이 일치한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 실증적 무예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베는 검법 동작에 대동류유술의 술기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으로 대동류유술의 한국재유입론, 즉 한국 고대의 무예가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옮겨지고 이것이 일본 유술의 근간(根幹)이 되고 다시 재유입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전혀 없지만, 그 후의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대동류유술은 그의 35대 다께다 소우가쿠(무전물각, 1860-1943)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제자인 최용술에게 전수되어 오늘날 합기도로 전승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동류유술의 한국무예관련설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은 명확한 규명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국의 고대 신라 무예가 일본으로 전이(轉移)되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일본 무도문화의 영향으로 전투적이고 실전적 성향에 따라 전환법이나 관절기에서 오늘날의 합기도 호신술(護身術) 형태로 계승되고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한국뿐만 아니라 와세다대학의 도미끼 겐지와 같은 일본무도학자들도 주장하면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동류유술을 최용술이 배운 적이 없고 다른 일본 유술을 배웠다는 주장은 최용술에 의해 전래된 합기도가 한국의 근대무예로서의 근원(根源)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게 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招來)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소지(素地)가 될 수 있다.
 
최용술이 다케다의 제자가 아니고 대동류유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주장은 대체로 2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가 일본의 대동류나 아이기도에서 최용술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대동류유술의 기본적인 술기로서의 검술은 전혀 지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무예역사가 후쿠오카에 의하면 대동류유술의 영명록과 어예록에는 최용술의 일본이름인 요시다 아사오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록상으로는 대동류유술를 수련한 조선인은 경상남도 울산 출신의 정형옥, 경상남도 동래 출신의 양어수, 평안도 양득출신의 김달민, 전라북도 전주 출신의 염득응 등으로, 1928년 11월 2일부터 25일까지 3회에 걸쳐 아키다야에서 다케다 소오가쿠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 문헌적 주장이다.
 
최용술은 대동류가 아닌 직수위주의 기술과 숫자 사용의 수련형태인 일본의 소림사권법을 배웠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동류는 장인목이 한국에 전수(傳受)한 것이라고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최용술이 일본의 소림사권법을 수련한 증거와 최용술의 합기도 술기 체계의 어떤 부분이 소림사 권법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단지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은 오히려 일본소림사권법은 중국 무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합기도는 중국무예의 아류(亞流)가 될 수 있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후쿠오카에 의하면 최용술이 아닌 오히려 대동류전서를 소장하였던 장인목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대동류유술의 진정성을 찾았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장인목이 대동류유술을 한국에 알린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장인목은 1915년 8월 25일 경상북도 영천군 신영면에서 태어나 1928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1935년에 대동류에 입문하게 된다.
 
장인목은 1943년 8월에 대동류의 비전목록 전 과정을 수료(修了)하고 1945년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다케다 소오가쿠의 직계제자가 아닌 대동류의 마쯔다 도시미도장, 즉 아사히가와의 쇼부칸에서 장인목이 대동류유술을 수련하였다고 전해진다. 장인목은 일본의 북해도에서 대동류유술 수업을 마치고, 1946년에 귀국하면서 대구를 중심으로 대동류유술(당시는 ‘야와라’라고 일컬음)을 전래시켰다는 실증사적인 주장도 있다.
 
최용술과 더불어 장인목은 합기도의 근원이 되는 대동류유술을 배우고 지도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합기도가 근대무예로 탄생되는 데 어느 정도 공헌(貢獻)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용술과는 달리 도장을 열어서 직접 합기도 술기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지도 않았고, 제자들을 육성하지 않고 지압(指壓)이나 접골(接骨)과 같은 활법(活法)관련 치료 또는 지도를 주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장인목의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공헌이나 역할은 최용술보다는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용술이 다케다의 직계제자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최용술의 진술대로 하면 그는 다케다로부터 26년간(1919~1945) 무술을 지도 받았고, 우에시바는 4년을 받았다고 했다. 최용술과 대동류유술과의 연관성은 기록지, 인터뷰 자료 또는 영명록 등의 의도적 무예사료들에 의한 실증적 자료들을 최용술의 구술(口述)을 통한 연구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한풀 무예가인 신상득 세계일보 기자는 최용술의 일대기를 다룬 ‘랑의 환국’이란 소설책을 집필하였는데, 최용술이 스승인 다케타 소가꾸의 수제자로써 긴 세월을 통해 대동류유슐 사사받은데 비해 우시에바 모리헤이는 다케다 스승의 제자가 쉽게 되지 못하고 더구나 짧은 기간에 지도를 받은 역사적 사실을 반(半) 논픽션 소설형식으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최용술의 다케다와의 인연과 관계에 대한 최용술의 회고적(回顧的)인 이야기가 과장(誇張)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언급한 다케다와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나 입산수련 내용 등과 같은 다케다에 관한 구체적인 일화(逸話)들은 같이 오랫동안 지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완전히 거짓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후쿠오카가 지적한 다른 조선인들의 대동류유술을 배웠다는 명부 이외에는 그들의 수련 과정이나 내용이 전혀 없고, 이들의 국내외에서의 수련 흔적이나 지도 등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보면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최용술이 기록상에 없다는 것은 역사적 왜곡(歪曲)으로 비난을 받는 일본이 의도적 누락(漏落)이나 기재(記載)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排除)해서는 안 된다.    
 
▲ 최용술과 장인목     © 한국무예신문
역사적 실증적 자료를 강조하는 일본역사의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서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해야 한다. 현재에도 침략사나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에 대한 역사 교과서 왜곡을 시도하고 있고,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의 고대 역사자료들을 모두 소멸(消滅)시키거나 자의적으로 왜곡시킨 사실로 볼 때, 한국의 합기도 성립과 일본 무술사에서의 연관성에 관한 사실이나 자료들을 고의(故意)로 누락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도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所見)이다.
 
특히 일제시대에는 한국을 일본의 속국(屬國)으로 하려는 민족말살정책의 의도하에 일본 역사학자들이 일제 총독부는 한국의 총 역사서 20만권 이상을 불태워버리거나 한국의 역사 왜곡작업을 했던 이유로 한국무예의 뿌리가 되었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모든 실증적 자료들도 같이 소멸되거나 왜곡되어 버렸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무예들의 역사적 자료들도 더불어 사라져버린 사실을 한국무예역사학자들이 개탄(慨歎)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 소장한 자료들만 가지고 주장하는 역사적 주장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執着)이나 절대적인 신뢰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고려해야할 것은 대동류유술의 기술적인 연관성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이기도만을 수련하고 합기도를 제대로 수련하거나 지도해 보지 않은 무예인들이나 무예 연구학자들에게 이러한 대동류유술과 합기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오해할 수 있다.
 
특히 합기도가 아이기도와 동일시 여기는 몇몇의 일본무도 유입론자들은 최용술이 전파(傳播)해서 형성된 현대의 합기도 술기가 대동류유술과 관련이 없다는 피상적인 주장에 수긍(首肯)하고 지지함을 피력(披瀝)하고 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무차별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합기도를 아이기도의 아류라고 여기는 대중적인 인식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필자와 같이 합기도를 오랫동안 수련하면서 대동류유술과 비교 연구를 해본 합기도인들이라면 보폭(步幅)이나 체술의 움직임에서 대동류유술와 합기도에서 공통된 술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아이기도 술기는 전환법을 행할 때 원반경이 크고 보폭이 넓은 회전법을 사용하는 반면, 합기도는 좁은 보폭과 신속한 전환법 동작들이 많이 사용된다. 이는 난이도가 높은 기술일수록 보폭은 1-2보 혹은 정지된 상태에서 짧고 간결한 동작으로 사선과 사각을 주로 구사하는 대동류유술의 전환법과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 최용술은 대동류유술에 관계된 자세하고 구체적인 기술적 언급을 하는 반면, 아이기도의 창시자 우에시바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신빙성(信憑性)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러한 기술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정도의 경지(境地)에 이르려면 그 기술의 오랜 기간의 수련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최용술이 대동류유술을 장시간 수련하고 배웠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反駁)의 여지(餘地)가 없다.
 
 또한 다케다 소우가꾸와 최용술의 수련행적이나 관계에 대한 최용술의 비교적 구체적 진술뿐만 아니라 그가 지도한 합기도 기술들이 전환의 보폭이나 관절기의 꺾는 동작들이 대동류유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최용술로부터 직접 운동을 배운 직계 제자들뿐만 아니라 합기도를 꾸준히 수련하거나 연구한 적지 않은 합기도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해방 이후 한국 합기도를 체계화하고 전파하는데 최용술이 크게 기여(寄與)하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합기도는 최용술의 손목을 거치지 않는 술기는 없다는 김이수의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합기도의 역사 정립에 있어 최용술의 위치 및 공헌에 대한 인정과 연구는 지속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란의 이슈는 최용술이 검술의 대가(大家)인 다케다 소우가꾸로부터 대동류 유술을 지도받았는데 왜 검술은 지도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동류의 근간은 미조구찌파나 일도류의 검술이고, 검술의 이치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은데, 최용술은 이러한 검술과 관련한 지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최용술이 다께다로부터 대동류유술을 직접 사사(師事)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용술이 다케다로부터 검술에 대한 지도를 깊게 받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가능성과 아니면 검술 지도에 대해 부정적이었거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서 검술에 대한 불필요성을 가졌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지도법의 선택에 있어서 검 위주인 일본 무도적 성격을 벗어난 차별성을 가지려고 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세계대전 패배 후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일본무도 제국주의의 야욕(野慾)과 일본군의 잔악(殘惡)함이 일본도(日本刀)를 사용하는 무도수련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서 한동안 일본의 검을 사용하는 무도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아이기도만은 평화를 추구(追求)하는 무도로서 수련을 허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의 아이기도 수련은 여전히 검을 가지고 하지 않는 맨손 연무수련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해방 직후에는 한국 또한 반일감정이 강했던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검을 지니거나 사용하는 무예 방식에 강한 반감(反感)이 있던 사회적 상황이었던 것도 이해를 하여야 한다. 따라서 최용술이 대동류유술에서 검술지도를 배제(排除)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더욱이 참전 군인이었던 모리헤이 우에시바가 창시한 파괴적인 무도의 속성을 지양(止揚)하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혁신적인 근대무예인 아이기도만은 수련을 허락했기에, 아이기도는 시작부터가 기술보다는 사상적 이론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고 발전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명심(銘心)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기도는 침략전쟁의 죄악을 감추고 미화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우에시바를 신격화(神格化)시키면서 종교적(宗敎的)인 색채를 띠게 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가령 일본정부가 무도 또는 예술 등의 일본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홍보에 투자하는 예산이 한국문화의 국제화를 위해 한국정부가 투자하는 금액보다 거의 60배에 이른다는 통계적인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들 또한 일본문화의 홍보성 미화에 젖어서 일본무도를 한국무예보다 우수한 무예로 보는 편견(偏見)과 고정관념(固定觀念) 또한 합기도의 정체성 확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성찰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냉철하게 요구된다. 
   
 위에 내용들로 인해서 아이기도를 뛰어난 근대무예의 하나라고 여기는 필자가 민족주의적인 감정이나 편견으로 아이기도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낼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상황에 관한 소견을 언급한 것이니, 혹시나 아이기도를 선호(選好)하거나 수련하는 독자들이 오해 없는 객관적인 판단을 바란다.
     
모리헤이 우에시바는 대동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본 검술과 유술을 혼합(混合)해서 아이기도를 만든 반면, 합기도는 최용술의 검술을 제외한 대동류유술의 기술들을 근본으로 하여 그의 제자들이 발차기나 권법의 타격기와 다양한 무기술을 접목시켜 한국형 무예로 형성, 발전되어 왔음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검을 사용하지 않는 합기도의 수련방식은 태권도, 가라데, 유도 등과 같은 대부분의 근대무예가 창이나 검을 사용하지 않는 맨손 무예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음을 주지(周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동양무예의 근대성은 맨손무술로서 새로운 변혁(變革)에 있는데 실전적인 무예가 호신 무예로 전환(轉換)된 것이 무예의 근대화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수련형식도 형 위주의 체계화되고 각 유파 무예들이 등장하여 ‘도장(道場)’과 같은 교육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무예를 발전시키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으며, 무예가 지닌 본래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최용술이 검술을 지도하지 않았다는 점이 합기도의 근대무예사의 시발점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합기도의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합기도의 무명(武名)에 대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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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7/15 [23:26]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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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도 2016/12/13 [14:37] 수정 | 삭제
  • 태권v님처럼 말씀 하시는게 억지고 몰지각한거라 생각드네요. 태권도가 예전 6,70년대 코리아 가라데로 불리면서 기술 또한 거의 흡사한데 무슨 적립한다는건지? 그리고 태권도가 합기도를 일본무도라고 우기지 합기도가 먼저 태권도 비방은 안한거같네요. 태권도 협회장 및 정치인들이 올림픽으로 키우면서 자기들 밥 그릇 안뺏기려고 언론플레이를 얼마나 했는데...그런 생각부터 버리셔야죠. 우리 동네 태권도관장보면 옆체육관 뭐하면 따라하고 애들 먹을거로 꼬시고 다른 태권도관장은 여름에 풀장만들어서 물총놀이하고 옆 체육관들 험담하고 기술체계가 확실하네요. 그런 말씀하시기 전에합기도가 명칭이 뭐가 같은지 설명해보시고 기술이 뭐가같은지 설명해보세요. 꼭 합기도가 최고다 태권도가 최고다 하기전에 그냥 서로 인정하고 무술로써 경쟁하면 되는데 요즘 제대로 된 체육관들이 없다는게 안타깝네요.
  • 수리뫼 2015/10/02 [23:08] 수정 | 삭제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군데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수정을 요청합니다.
    1)다케다 소가쿠(武田?角)- "무전총각"인데 이것을 "무전물각"이라고 하셨더군요. 한문이 안 올라가네요. 물건할 때 물
    2)대동류유술에 검술이 없다구요?
    제가 알기로는 수제자인 김정윤씨에게 모든 술기를 남겼구요. 김정윤씨는 지금 전북 남원 근교에서 사범 위주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한풀).
    신상득씨가 쓴 "랑의 환국"이란 소설은, 일종의 소설 형식을 빌린 거의 넌픽션 형태의 기록물입니다. 신씨도 지금 일산에서 "파람"이라는 이름으로 기예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한풀이든 파람이든 거기에는 이름만 다를 뿐 검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실전기예들이 살아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다음 카페 "파람"이나 "한풀"을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제 넘은 말씀 죄송합니다.
  • 태권V 2015/07/20 [18:58] 수정 | 삭제
  • 합기도는 일본거죠. 합기도 보다 먼저 들어온 검도 유도 공수도가 한국거라고 하는 것과 다를바 없죠. 검도 유도는 대한제국멸망 이후 군정식후련과목이였으니 지금으로 부터 100년도 넘었습니다.그래도 일본 무도죠. 공수도도 그렇구요. 합기도만 다르다고 하는건 억지죠. 합기도인들 할말 없으면 자꾸 태권도 걸고 넘어지는데 그러려면 합기도란 이름부터 버리고나서 태권도를 비교하던 예로 들던 합시다. 합기도가 일본무술인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합기도인들만 우기시내요. 합기도가 일본무도면 태권도도 일본무도라고 하는 일부 몰지각한 합기도인들 그건 정말 매국입니다. 태권도 처럼 한국무도가 되려면 태권도 처럼 무도이름부터 바꾸고 태권도처럼 기술체계를 정립해서 세계 공통 교본을 만들고 같는 용어, 명칭, 기술을 하도록 만드십시오. 일본 무도 이름 버리지 않고서는 무슨 억지를 부려도 합기도는 일본무도입니다.
  • ㅋㅋ 2015/07/16 [20:06] 수정 | 삭제
  • 백사범 웃기네요. 일본은 섬나라라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그만큼 내전이 많았습니다. 태권도도 가라데의 모방에서 시작한 거고, 합기도도 최소한 일본에서 최용술 도주가 야와라를 배워 온데서 시작한 건 확실합니다. 그게 대동류나 아니냐의 문제지요.
  • 김성진 2015/07/16 [14:42] 수정 | 삭제
  • 현재가 중요합니다 . 사회학적 속성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것은 소멸하고
    다시 그시대에 부합되는 무술이 만들어져 대중의 선택을 기다리지요.

    에로화 -사회화-탈사회화.- 재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니 ....

    그냥 현재에 충실하세요 세계적 사회현상과 국내 사회 현상들중 다문화를 인정하고
    부흥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마당에 과거에 억매여 살고 있는 모습 웃습네요

    현재 무술에 충실하며 돈많이 벌고 제자들 잘지도하고 훌륭한 지도자로 남기위해
    조금 노력함이 어떨까요.
  • 백사범 2015/07/16 [11:20] 수정 | 삭제
  • 합기도가 일본무술에서 전수되었다고 볼수 없다고봅니다*경호학이나 태권도학문에서는무술의 발전은 전쟁을 많이 격은 나라에서왔다는 것이,유럽과 동야의 학문에 있습니다,지금의 한국은 일본 보다 외적의 칩입을 많이 받아서 무술이 일본보다 더발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무영합기도 2015/07/16 [01:53] 수정 | 삭제
  • 그래도 종주국이니 누가 창시자니 누구에게 전수받았느니 이런것이 중요할까요? 자신의 길에 불리하면 증거부족이니 운운하며 합리화 하시는 분들이 만들어논 기록을 바탕으로 합기도의 역사를 어찌 판단할까요? 저도 혼란스럽지만 무술의 이름보다는 무술에 임하는 자세나 기본원리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글 죄송합니다.
  • 무영합기도 2015/07/16 [01:47] 수정 | 삭제
  • 대동류, 덕암류, 아이기도, 다케다, 우에시바, 합기유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죠? 어떻게 끼워맞추든 글을 읽는 사람은 쉽게 오류를 범할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배웠고 누구에게 전수했는냐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기술의 가치가 더중요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태권도가 종주국으로서의 역활을 못하든가 무에타이를 태국보다 다른나라가 잘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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