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통성 가치지향에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합기도 역사적 정체성의 명확한 정립의 실패이다.
합기도는 국내외적으로 양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내부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으로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여 왔고, 일본의 아이기도와 무명(武名)의 유사성에 관한 끊임없는 시시비비로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무예연구가와 학자들이 합기도의 역사를 규명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 오고 있지만, 대부분의 합기도 역사들은 사실성의 부족과 고증적인 부재로 내용의 추상성 등 역사적 무의미성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명확한 역사적인 정통성을 정립해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바른 합기도 역사의 연구는 합기도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자료(사료)를 수집하고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과거의 사건을 조심스럽게 재구성해 가면서 최대한 객관성을 토대로 사실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합기도에 관련된 자료들이 불충분하더라도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비판과 분석, 그리고 해석 및 재구성할 수 있는 무예 역사학자의 직관력과 추리력이 요구되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존의 한국의 전통무예 연구들은 대부분 인물 중심이나 전쟁후의 영향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단순하게 나열해 놓는 것에 그치고 있다.
사실 그러한 피상적인 무예연구의 이유는 그 시대의 무예가 사회 문화적인 생활상 또는 교육적으로 어떠한 연관성과 상관성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고대 초기 사회에 약간의 언급이 있을 뿐 그 이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어 실증적인 역사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예(武藝)라는 분야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사회의 주요지배층보다는 저계층에서 행하여지는 이유로 사회의 큰 비중이 아닌 주변적인 문화로 전락하고 머물렀기에 상류층의 주요 문화 위주로 서술되는 역사서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무예역사의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다.
특히 합기도 역사의 연구고찰에 가장 큰 문제점은 무협지무술사관의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독 계보나 계파를 따지는 것을 강조하는 일본무술사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협지무술사관은 무예법의 비전 및 영웅담 위주적인 서술로 그 무예 수련한 개인의 역사 및 사제관계의 계보를 바탕으로 무예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다.
대부분의 합기도의 역사 연구물들은 다케다 소우카꾸와 최용술, 일본 아이기도의 우에시바의 이야기 그리고 최용술 제자들의 계보를 우선적으로 설명하며 역사를 고찰해 나가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예는 제도화된 문화가 아니며 일부 한정된 사람들이 특별한 교육을 통해서 얻게 되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제도적인 교육을 받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생활 속에서 보급되어지는 신체문화의 특징을 지닌 민속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민속 문화는 씨름이나 윷놀이, 제기차기 등과 같이 특정한 계보 없이 전승되는 것이다. 가령 태껸은 계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태껸이 전통적인 우리 문화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 정체성의 모호성으로 한국의 근대 무예사를 논할 때 대부분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유입된 일본 무술이라는 입장과 한국 무예 대부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어 다시 한국으로 역유입된 것이라는 상반된 주장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
한국의 전통무예의 흔적을 찾기 위한 신빙성 있는 자료가 무예도보통지와 소수의 그림들뿐이고 그것도 태껸과 국궁, 씨름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국의 근대 무예들은 전통무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까지 거론하며 명확한 실증적 자료와 물증 없이 고대 벽화나 책자에 그려진 애매모호한 그림들이 자신들의 무술동작이라는 억지 주장들이 특정 무예의 문헌이나 무예가의 진술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합기도의 역사 연구도 이러한 실증적 부재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기도 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합기도의 역사로부터 시작되는데 역사적 사실여부는 정체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기도 정체성 문제의 중심에는 역사적 정체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논란들이 있다.
‘합기도의 역사적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합기도는 한국의 고대무예를 계승 발전시킨 한국의 전통 무예인가? 아니면 일본 무술 아이기도가 변형된 무예인가?’, 또는 ‘합기도는 한국의 고대 무예가 일본에 건너가 유술(대동류유술)로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다시 한국으로 재유입된 무예가 맞는가?’ 등이다.
이러한 논란들은 합기도의 역사는 ‘한국전통무예설 ‘일본무술 유입설’ 또는 ‘ 한국무예의 재유입설’ 등으로 나뉘어 많은 논란들을 만들어 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인인 태권도도 기원설에 관해서 일본 가라테와의 연관성으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가라테 유입론)’와 같은 역사적인 기원설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듯이 합기도의 기원에 있어서도 크게 3가지의 논란 속에 있다.
한국 전통무예설에 의하면 합기도는 전통무예의 기법을 가미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무예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 시대에 있었던 권법, 수박이 현대의 유도나 공수도, 합기술과 유사하여 현대 무도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고 그 시대의 권법의 원리가 유술과 흡사하므로 합기술의 기원도 여기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일본무술유입설은 합기도는 여러 유형의 무예들이 일본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 원형은 일본의 아이기도이라는 것이다.
한국무예의 재유입론은 합기도는 고대 한국의 삼국시대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의 전통무예로 발전되어 오늘날의 합기도로 다듬어져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합기도의 역사적 기반만을 근거로 한 ‘한국전통무예설’, ‘일본무술유입설’, 그리고 ‘한국무예의 재유입론’들은 각각 논리적이지 못하고 설득지이지 못한 한계성의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받아 오고 있다.
합기도의 정통성 가치지향에서 역사적 정체성의 확립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합기도의 올바른 역사적 정체성 방향을 제안하기 전에 필요한 작업으로 역사적 정통성에 논란이 되는 ‘한국전통무예설, ‘일본무술 유입설’, 그리고 ‘재유입에 의한 전통무예설’등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서 각각의 한계점과 문제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한국전통무예설’은 일본에서 대동합기유술을 수련한 최용술과 그의 제자들이 한국의 다른 전통 무예와의 결합으로 전통적인 합기도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논리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예컨대 최용술의 독자적 기술에 의해서 합기도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최용술이 그 전에 수련한 일본의 대동류유술과의 관련성을 무시하는 관점은 사실고증적인 측면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또한 한국의 전통무예과의 결합설에 대해서도 가령 수박, 권법, 택견이 합기도 기술과는 기술적인 관련성이나 적합성 등의 필연적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타격기 위주인 태권도 또한 한국의 전통무예인 태껸과의 기술 연관성 찾으려는 쉽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물며 합기도와 같이 잡고 꺾고 던지는 유술적 특성의 기술적인 연관성들은 한국의 전통무예에서 역사적인 증거나 문헌이 전혀 없고 추측만 난무하다는 것이다.
합기도와 한국 고대 맨손 무예인 수박이나 택견에서는 그 연관성을 사실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데는 어려움과 한계점이 너무 많다.
수박이라는 의미가 손으로 얽어 싸운다는 의미에서 유술적인 연관성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가령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고 상대를 잡아 넘어뜨리는 체기가 지방마다 다른 이름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평안도의 “날파름”, 전주의 “챕이”, 김해 양산 밀양 등지의 ‘잽이’, 제주도의 “발칠락” 등이다.
그러나 각 지역의 맨손무예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었고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지역간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기에 지역마다 독특한 맨손무예의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고증학적 관점에서 고대의 합기도 기술과 유사한 유술의 기술적인 몇몇 모습들이 중국의 진한시대,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청나라에서 출토된 동상들에서 나타난 사료들이 발견되어 왔음을 일부 무예연구가들이 밝혀내는 학문적 성과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기술이 한국에 어떻게 전래되고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한국 무예사에서의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중국과의 수많은 전쟁을 통해 기술들이 전래되었다는 막연한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고대 자료의 부재 특히 일제 강점기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특히 고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무예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소멸로 사실주의에 입각한 실증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합기도는 일본무술이다고 주장하는 일본무술 유입설이다. 일본무술 유입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선 일본의 아이기도와의 같은 ‘合氣道’ 한자어를 가지고 있는 무명(武名)에서 보더라도 합기도의 기본적인 기술들과 원리들은 아이기도이다라고 김용옥교수는 주장하면서 합기도의 일본무술론 입장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최종균 교수를 비롯한 일부 무예학자들은 최용술이 일본에서 대동합기유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실증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최용술은 대동류가 아닌 직수위주의 기술과 숫자 사용의 수련형태인 일본의 소림사 권법을 배웠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동류는 장인목이 한국에 전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무술 유입설은 합기도 수련 경험이 없고 피상적인 연구에서 오는 오류를 범하는 학자들이나 일본 무술사관에 젖어 있는 학자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위험성이 있다. 특히 신라의 고대무예인 대동류유술을 최용술이 배운 적이 없고 다른 일본 유술을 배웠다는 일본무술 유입론자들의 주장은 최근 설득력을 얻고 일반화 되어가고 있다. 합기도의 일반화되고 있는 최용술에 의한 한국무예의 일본을 통한 재유입설을 전면 부정하게 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다케다 소우가꾸와 최용술의 수련행적이나 관계에 대한 최용술의 비교적 구체적 진술뿐만 아니라 그가 지도한 합기도 기술들이 전환의 보폭이나 관절기의 꺾는 동작들이 대동류유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합기도를 수련하거나 연구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더욱이 해방 이후 한국 합기도를 체계화하고 전파하는데 최용술이 크게 기여하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합기도는 최용술의 손목을 거치지 않는 술기는 없다고 김이수의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합기도의 형성에 있어 최용술의 위치 및 공헌에 대한 인정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적 실증적 자료를 강조하는 일본 또한 신뢰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도 침략사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역사 교과서 왜곡을 시도하고 있고, 특히 일제 강점기에 민족말살 정책으로 한국의 고대 역사자료들을 모두 소멸시키거나 자의적으로 왜곡시킨 사실로 볼 때 한국의 합기도 성립과 일본 무술사에서의 연관성에 관한 사실이나 자료들을 고의로 누락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 소장한 자료들만 가지고 주장하는 역사적 주장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절대적인 신뢰를 경계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무술 유입론자들의 결정적인 논리적 오류는 합기도는 다른 무예들처럼 사제(師弟) 관계에 의해 엄격하게 비전되고 있는 무예가 아니라 발전과정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한 포괄적인 문화적 전승이 이루어져 온 신체문화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무예로서의 합기도는 일본의 대동류유술뿐만 아니라 한국무예(태권도, 태껸)와 중국무예 특성들이 융합되어진 형태로 진화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 의해서 다음 글에서는 합기도의 한국무예의 재유입설과 합기도의 무명(武名) 논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