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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당에서 종아리 때린 이유 알고봤더니..
서상욱의 주역산책<7> 몽괘의 괘상과 효사는?
 
서상욱(사학자) 기사입력  2012/06/2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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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사학자) 
<몽괘(蒙卦)>
어리고 우매(愚昧)하면 교화(敎化)를 통하여 깨우쳐야 한다.
 
[본문]
蒙(몽) - 亨(형). 匪我求童蒙(비아구동몽), 童蒙求我(동몽구아). 初筮告(초서고), 再三瀆(재삼독), 瀆則不告(독즉불고). 利貞(이정)
初六 - 發蒙(발몽), 利用刑人(이용형인), 用說桎梏(용설질곡), 利往(이왕), 吝(린).
九二 - 包蒙吉(포몽길), 納婦吉(납부길), 子克家(자극가).
六三 - 勿用取女(물용취녀), 見金夫(견금부), 不有躬(불유궁), 无攸利(무유리).
六四 - 困蒙(곤몽), 吝(린).
六五 - 童蒙(동몽), 吉(길).
上九 - 擊蒙(격몽), 不利爲寇(불리위구), 利御寇(이어구).
 
괘사 - 몽(蒙)은 괘명으로 어려서 몽매(蒙昧)하다는 뜻과 함께 계몽(啓蒙) 또는 교육(敎育)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몽괘에는 《주역》의 교육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둔괘가 신생아가 겪는 어려움이라면, 몽괘는 둔괘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둔괘에서 벗어나 형통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몽괘의 교육관은 현대의 교육제도와 다르다. 현대는 교육기회의 평등을 수단으로 삼지만, 몽괘에서는 교육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찾아가는 방법은 옳지 않으므로, 스스로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남인도 찰제종(刹帝種)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아들인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는 양(梁)의 보통(普通) 원년인 AD520년 중국의 남부해안도시인 광주(廣州)로 건어와 선종(禪宗)의 시조가 되었다. 나중에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로 옮긴 그는 종일 벽관(壁觀)을 하며 수도에 전념했다. 낙양 무뢰(武牢)에서 태어나 용문(龍門)의 향산(香山)으로 출가하여 보정선사(寶靜禪師)의 가르침을 받고, 영목사(永穆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신광(神光)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유가와 불교를 통섭했다.
 
32세에 다시 향산으로 돌아 온 그는 8년 동안의 좌선을 끝낸 후에 북위의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인 AD520년에 숭산으로 달마를 찾아갔다. 그가 숭산을 찾은 날은 엄청난 눈이 내렸다.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한 그는 밤을 꼬박 새운 후에 왼쪽 팔을 잘라서 자신의 굳은 뜻을 보여주었다. 비로소 배움에 대한 갈망을 알게 된 달마는 그를 방으로 불러들여 제자로 삼았다. 훗날 달마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선종의 2대 법통을 이어받은 신광은 법명을 혜가(慧可)로 고쳤다. 이상이 불교에서 전해지는 단비구법(斷臂求法) 즉 팔을 잘라 불법을 구했다는 유명한 실화이다.
 
그 외에도 스승을 찾아갔다가 몇 년 동안 고된 일을 하다가 간신히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고대의 스승들은 함부로 제자를 두지 않았다. 돈을 받고 학문을 판매하는 현대식 대중교육관과는 판이했다. 옛 스승들이 제자를 선택할 때의 기준은 자질과 공부에 대한 열성이었다. 두 가지가 겸비되지 않으면 충분한 교육효과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오래 전에 속리산 자락에서 은거하던 스승을 모시고 침구술을 배웠다. 제자라고는 앞을 보지 못하는 청년 한 사람과 심한 소아마비를 앓아서 걷지 못하는 처녀 한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필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라고 하셨다. 첫째는 언제든지 선생님께서 내쫓으면 군소리하지 말고 나갈 것, 둘째는 공부를 해서 다른 사람을 치료하더라도 절대로 돈을 받지 말 것, 셋째는 누구에게 배웠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이 배움을 허락하는 조건이었다. 당시에 필자는 침구술을 공부하는 것보다 거처할 곳이 없어서 간신히 찾아갔으므로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기꺼이 수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농반진반으로 웃으시며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가 있다고 하셨다.
 
이미 고인이 되신 선생님과의 약속 가운데 첫 번째는 1년을 채운 후에 하산명령을 받고 쫓겨났으므로 저절로 지켰고, 두 번째 약속은 지금도 잘 지키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약속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절반은 어기고 있다. 대중교육 또는 국민교육이 가능해진 것은 교육받은 인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급격한 증대와 민주화 때문일 것이지만, 교육의 내용이 체화될 때까지를 목표로 삼았던 고대의 교육과 박제화된 지식을 관념적으로 익히는 현대식 교육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성기에 공자의 제자들은 지금의 어지간한 학교보다 많았다. 《논어》를 보면 '인(仁)'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을 설명한 내용만도 수 십 가지가 넘는다. 학생의 자질과 수준에 맞춘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또 고대의 스승은 혼자서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친다. 유명한 학자들도 여러 분의 스승을 모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다. 기능이나 기술 또는 지식을 익히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분리된 전문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를 쌓아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 궁구하다가 반드시 물어야 할 사항이 있으면 스승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그러므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서 스승이 주도적으로 강의를 하는 학습방법과는 달랐다. 제자가 스승을 믿지 않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교육이었다.
 
처음에 《주역》을 공부할 때 주변 사람들은 필자가 점치는 법이나 명리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기야 역학(易學)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주역》은 고대에 점을 쳤던 기록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우리가 공부하는 괘사나 효사는 대부분 그 결과에 대한 기록이다. 실재로 《주역》에는 시초점(蓍草占)을 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두었다. 그러므로 《주역》을 터득한 사람이라면 점도 잘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주역》의 철리(哲理)를 응용한 의학, 군사학, 명리학, 풍수지리학, 역학(曆學) 등의 다양한 실용학문이 있다.  
 
몽괘의 괘사에서는 교육의 방법론을 점치는 일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초서고(初筮告) 재삼독(再三凟) 독즉불고(瀆則不告) 이정(利貞)'이 그것이다. 우선 고대인들의 점에 대한 관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은 은왕조의 후예였던 기자(箕子)가 무왕의 자문요청에 응하여 제출한 통치술에 관한 설명이다. 9개의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흔히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 한다. 그 가운데 7번째 조목인 '계의(稽疑)'는 군주가 아무리 고민하고 신하들과 함께 토론을 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는 점을 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복서(卜筮)'가 있다. 복은 거북점을 가리키며 서는 시초점을 가리킨다. 점을 치는 사람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지만 같은 의문을두고 세사람이 동시에 점을 치게 하고 두 사람 이상의 의견이 일치되면 그것에 따라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스스로 고민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귀족들이나 관리들에게 물어보고,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백성들에게까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북점이나 시초점은 맨 마지막에 취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일치하면 그것을 '대동(大同)'이라 하여 자손만대에 번영이 보장되는 대안으로 삼는다. 요즈음 사람들처럼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심심풀이로 돈 몇 푼 내고 물어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신중하게 점을 쳐서 의문을 품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더니 의심이 나서 나가다가 돌아와 다시 묻고, 집에 가다가 휴대폰으로 다시 묻고,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전화로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은 점을 쳐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독(瀆)'은 하수구처럼 오염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묻고 대답하는 사람들끼리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그러한 상대에게 점을 친 결과를 자꾸 설명한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독즉불고'는 그러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정'은 확고한 신뢰가 있어야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필자는 신년초가 되면 임진강 부근에 있는 사찰에서 주역점을 쳐준다.
 
흥미나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 있으면 점을 치는 형식을 빌려서 상담을 하는 것이다. 성실하고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은 스스로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필자는 맞장구를 쳐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필자가 대단히 용한 점쟁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철저한 자기성찰과 고민을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뿐더러 자꾸 자신에게 뭔가 대단한 행운이 들어 올 것이라는 대답을 하라고 강요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필자는 돌팔이 점쟁이로 전락한다. 왜 점을 치거나 사주를 보러 오는지 알 수가 없다.
 
'초서고'는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같다. '啐'는 맛을 본다는 뜻으로 사용될 경우는 '쵀'로 떠든다는 뜻으로 사용될 경우는 '줄'이라고 읽는다. '啄'은 부리로 쪼는 모습을 가리키는 의태어이다. 병아리가 부화를 할 때 알 속에서 열심히 이곳저곳을 부리로 쪼며 내는 소리가 줄이다. 어미닭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소리를 듣다가 병아리가 집중적으로 쪼는 곳에 한 번 쪼아준다. 병아리와 어미닭의 부리가 부딪치는 순간에 두터운 알에 금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선종에서는 수행자의 기(機)와 봉(鋒)이 마주치는 순간을 줄탁이라고 한다. 《벽암록》 16칙에서는 '어떤 중이 경청(鏡淸)에게 학인(學人)은 줄을 하고, 강사는 탁을 한다'라고 했으며, 7칙에서는 '법안선사(法眼禪師)께서 줄탁이 동시에 기(機)에 이르면 용(用)에 통달한다'라고 했다.
 
줄탁동시란 수행이 완성되려는 순간에 스승이 제자에게 대단히 함축적인 한 마디의 가르침을 주면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스승과 제자의 인격과 신뢰가 직접 마주치며 부처의 생명이 전해지는 위대한 순간이다. 시초점으로 괘를 뽑을 때는 점을 치는 사람과 대답을 듣고자 하는 사람의 엄청난 집중과 발원(發願)이 필요하다. 서로의 인격과 신뢰가 부딪쳐 동화가 되는 순간에 점괘가 나온다. 그것을 의심하고 자꾸 묻는다면 괘를 뽑기 전의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줄탁이라는 말을 아주 단순화하면 힌트(Hint)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의 전광진(全廣鎭) 교수는 《속뜻사전》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힌트학습법이라는 공부방법을 체계화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어렵게 문자학을 전공한 전교수는 조선일보에 장기간 한문공부코너의 집필을 맡고 있다. 그는 남다른 공부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득했다. 모든 학문은 용어가 키워드이고 키워드는 대부분 한문용어로 응축되어 있다.
 
한문을 깨우치지 못한 교사는 간단하게 설명해도 되는 용어를 복잡하게 설명하거나 아니면 원뜻보다 더 어렵게 설명한다. 심한 경우에는 설명을 들으면 더 복잡해지고 이해가가지 않는다. 전교수가 펴낸 속뜻사전을 본 필자는 정말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원래 간명하고 재치 있게 설명을 잘 하는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힌트 하나로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필자는 그 순간에 전교수와의 '줄탁동시'가 이루어지는 것을 느꼈다.
 
초육 -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을 계몽(啓蒙)이라 한다. 초육의 효사에서는 그것을 형벌을 받는 사람의 질곡(桎梏)을 벗겨주는 것과 같다 했다. 몽매함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유라는 개념은 Freedom과 Liberty로 구분된다. 전자는 타인 또는 권력으로부터 억압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천부적 권리를 의미하며, 후자는 억압에서 벗어나 취득한 법률적 또는 통념적 권리를 의미한다.
 
전자가 소극적 개념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개념이다. 전자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설정된 개념이라면 후자는 주관적 개념이다. 어떤 의미가 되던 인간은 자유를 향유하려면 적절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법적인 자유가 주어졌더라도 그것을 향유할 능력이 없으면 타인의 자유와 충돌했을 때 또는 현실적인 상황으로부터 억압을 받았을 때 자유를 구가할 수가 없다.
 
몽괘 초육의 효사에서는 무지몽매한 상태를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고 규정했다.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지의 상태는 철창에 갇힌 죄수와 같다. 따라서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교육은 죄수를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것과 같다. 그것을 계발(啓發)이라고 한다. 발몽(發蒙)은 몽매한 상태를 계발한다는 뜻이다. '형인(刑人)'은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 '說'은 '벗긴다(脫)'는 뜻으로 읽을 때도 탈이라고 한다. 질곡은 형벌의 도구이다. '질(桎)'은 발에 채우는 족쇄로 큰 벌을 내릴 때 사용하며, '곡(梏)'은 손에 채우는 수갑으로 작은 벌을 내릴 때 사용한다.
 
그러나 자유의 이면에는 방종과 방임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숨어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적절한 형벌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초육은 몽괘에서 가장 아래에 있으므로 가장 어리석은 단계이다. 어렵게 가르쳐주어도 조금만 풀어주면 다시 무지몽매한 상태로 돌아간다. 따라서 너무 쉽게 질곡에서 해방시켜주면 오히려 그르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형벌이 지나치면 영원히 개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전과자들이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그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왕린(以往吝)은 그러한 가능성을 경계한 말이다.
 
형벌이냐 교육이냐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펼쳤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유가는 대체적으로 교육을 통한 감화를, 법가는 엄격한 형벌의 적용을 통해 사회적 안정과 효율을 제고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정답은 없다. 양자를 겸비하면서 적절한 운영의 묘를 찾아낸다면 발몽에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라는 문제와 결부하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건강하지 못하다고 형벌을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단지 금연법, 금주령, 도로교통법, 환경법과 같이 타인의 건강에 지장을 주는 행위를 법으로 정할 수는 있지만,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건강을 포기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결국 유일한 대안은 교육뿐이다. 
 
구이 -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상하다는 뜻이다. 또는 가정의 두 기둥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역을 분담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 현상으로 자석을 보면 같은 극은 밀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는 동류상취(同類相聚) 또는 유유상종(類類相從) 현상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주역》에서도 상응(相應)과 상비(相比)라는 개념이 있다. 상응관계는 하괘의 초효와 상괘의 사효, 하괘의 이효와 상괘의 오효, 하괘의 삼효와 상괘의 육효사이를 가리킨다. 이들의 관계에서 음양이 서로 다를 경우는 상응 또는 정응(正應)이라고 하며, 같은 경우에는 불응(不應) 또는 적응(敵應)이라고 한다. 상비관계는 어떤 효를 중심으로 아래와 위에 있는 효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도 음양이 서로 다르면 상비관계가 성립된다. 상응과 상비가 동시에 성립되면 비를 버리고 응을 택한다. 상비관계보다는 상응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이러한 관념은 만물의 관계를 분석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명리학에서도 음양이 같은 간지나 지지가 형제관계로 만날 경우는 겁재(劫財) 즉 재물을 놓고 살벌하게 싸우는 형제사이가 된다. 그러나 음양이 다를 경우는 비견(比肩)이라 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형제애를 자랑하는 사이가 된다. 같은 극끼리는 라이벌의식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구이는 득중을 한 양효이므로 아버지에 해당하며 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구이의 효사는 아들의 교육에 관한 사항이다. 아들에 대해 대부분의 아버지는 기대를 하고 어머니는 걱정을 한다. 대부분의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꾸중을 듣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여부보다는 탈 없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선이다. 
 
▲ 자료이미지. 동명선습     © 한국무예신문
현재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그 역할이 바뀐 것 같다. 치마 바람이 상징하는 것처럼 어머니들이 아들을 닦달하고 아버지들이 오히려 느슨하다. 몽괘 구이의 효사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여러 가지 무지함을 포용하고, 아들의 교육에 대한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길하다고 했다. 성장한 아들은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나중에 가정을 잘 꾸려간다. 납(納)은 용납한다는 뜻이고, '극(克)'은 다스리는 이치를 가리킨다. '가(家)'는 가정이다. '납부길(納婦吉)'은 아들이 성장하여 아내를 맞이하면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아들의 교육에 별로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우리나라는 이미 몽괘 구이효의 뜻이 실현되었을까?
 
육삼 - 구이가 아들에 대한 교육이라면 육삼은 딸에 대한 교육이다. 우리 속담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다. 시집을 잘 가면 된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속담이다. 필자의 아내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과거에는 군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남편이 대대장이면 아내는 연대장이고 아들은 사단장이라는 풍자가 유행했던 적도 있다.
 
필자와 아내는 무려 13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필자의 친구들이 아내의 대학시절 스승이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후배들이 형수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개 야인에 불과한 필자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누는 전직 S대학교 총장님이나 은퇴하신 교수들까지 막내딸 정도에 불과한 아내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아내에게 별로 해 준 것이 없어 미안했던 필자도 그 때는 제법 목에 힘을 준다. 참으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이다.
 
몽괘 육삼의 효사에서는 필자와 같이 가난하지만 제법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여자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물이나 세력을 가진 '금부(金夫)'를 노리는 여자는 결혼상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했다. 취(取)는 아내로 맞이한다는 뜻을 가진 취(娶)와 통한다. 그러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망신을 당한다. 불유궁(不有躬)은 자신의 몸을 망친다는 뜻이다. 그러니 유리할 리가 있겠는가?
 
육삼효는 자신과 정응을 하는 상구효를 마음에 두고 있으므로 결혼을 하더라도 다른 애인을 두고 지낸다. 게다가 상비관계에 있는 나이 어린 구이효에게도 추파를 던진다. 한 마디로 정숙하지 못한 여자이다. 표현은 장가들 나이가 된 아들에게 훈계하는 것 같지만, 딸에게 정숙하지 않으면 시집도 가지 못하고, 시집을 가서도 행동이 바르지 않으면 신세를 망치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육사 - 아이가 의지할 곳 없어 편안하게 교육을 받을 입장이 되지 못하니 공부를 할 의지가 있더라도 고학(苦學)을 하거나 독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육삼과 육오와 같이 몽매한 무리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더더욱 환경이 좋지 못하다. 훌륭한 스승이나 후원자 노릇을 해야 할 상구효는 너무 먼 곳에 있고, 의기투합을 하며 우정을 나눌 구이효도 멀리 있다. 구이효는 육오효와 정응을 하고 있으며, 육삼효는 상구효와 정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육사와 상응해야 할 초육은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더욱 무지뭉매한 자에 불과하고 같은 음효이기 때문에 적대관계를 맺고 있다. 참으로 갑갑한 신세이다. 그러한 환경에 놓였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극복을 할 수가 있지만 음효이므로 의지도 약하다.  
 
자질과 배움을 기준으로 사람의 등급을 나누어보자.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다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라 할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모든 것을 깨닫고 있다는 뜻이니 가히 성인이나 천재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석가모니께서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다니 그야말로 생이지지임을 일갈하신 것이다. 이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두면 저절로 세상만사를 통찰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학이지지(學而知之)이다. 배워야 아는 사람들이나 맹자가 말한 영재 정도에 해당한다. 영재는 스승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칠 필요가 없다. 몽괘의 괘사에서 말한 '초서고' 정도만 가르쳐도 그 다음은 스스로 깨우친다. 스승으로서 그보다 기쁘고 신나는 일이 있을까?
 
그래서 맹자는 영재를 제자로 얻을 수 있다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누린다고 했다. 세 번째 단계는 '곤이지지(困而知之)'이다. 곤란해보아야 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람들은 곤이지지의 단계를 우습게 여기지만 필자는 그들이야말로 인재라고 생각한다. 곤란함에 처해서도 깨우침을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러한 노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질을 지녔으니 그들을 감히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곤이지지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한 집단의 지도자 노릇은 충분히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곤이부지(困而不知)'인 사람들이다. 곤란함에 처하면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그래서 잘못을 다시 반목한다. 필자와 같은 사람이다.
 
육사의 효사에서 말한 곤몽(困蒙)은 곤이부지의 단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린(吝)'은 인색하다는 뜻이니 배움에 뜻도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육오 - 육오는 상괘에서 중(中)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장차 상당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음이 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아직은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황태자나 재벌의 후계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왕사(王師) 정도의 훌륭한 스승인 상구와 상비관계를 맺고 있으며, 평생의 동지가 될 구이와도 정응관계에 있다.
 
훌륭한 스승과 벗이 있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교육을 받으면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것이다. 상괘에서 중을 차지했으므로 편향된 성품을 지니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순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인다. 조선의 중종시대에 박세무(朴世茂)가 편찬한 《동몽선습(童蒙先習)》은 역사교과서로 학생들이 《천자문(千字文)》 다음에 익혔던 중요한 교재였다. 책의 제목에 들어간 동몽이라는 말은 몽괘 육오효의 효사에서 따왔다.
 
상구 - 문제는 바로 상구효이다. 요즈음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부끄러운 학교폭력이 있다. 학교폭력이라면 흔히 선생이 학생을 때리거나 성격이 거친 학생이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을 가리키지만, 필자가 말하는 학교폭력은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을 때리거나 자기 자식의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심하지만 않다면 아이들이 서로 때리고 맞는 것도 일종의 경험이다. 또 선생이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일종의 교육이다. 그러나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가 선생과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상구효라는 아이는 술집에서 종업원들에게 맞았다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고 그 아버지는 깡패나 부하들을 데리고 아들을 때린 사람들을 찾아가 폭력을 휘두른 한화그룹의 김모 회장 부자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학생 정도 되는 아들이니 술을 마시는 것이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아들이 왜 맞았을까를 궁급하게 생각한다. 술집 종업원들이야 워낙 서비스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니 어지간해서 손님과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거만하게 굴었으면 그러한 술집종업원이 손님을 때렸을까? 그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상구효는 강한 양효가 가장 높은 곳에 있으므로 양기가 지나쳐 독선적이고 거만한 아이가 된다. 아래에 있는 다섯 개의 효는 모두 약간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인 아이들이지만, 상구효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엄하게 가르쳐야 할 아이이다. 이러한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면 도둑놈과 같은 심성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격몽은 때려서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도둑놈을 대하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이 자기 자식을 감싸는 것을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지만 필자는 한화의 김모회장에 종업원에게 맞았다고 고자질하는 아들부터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쳤다면 한화그룹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격몽은커녕 보복폭행을 하고 말았으니 과연 한화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혹시나 이렇게 썼다고 필자도 폭행을 당하지는 않을까?
 
기왕지사 격몽에 대한 말을 해야 하니 체벌에 관한 뒷담화를 좀 더 하겠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님께서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학습서를 지으셨다. 글자 그대로라면 '어리석은 아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때리면서 가르치는 요령' 정도로 풀이할 수 있지만, 당연히 선생님께서 그런 뜻으로 책을 지으셨을 리가 없다. 이 책에는 심오한 철학과 이론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와 배운 것을 충실히 실행하라는 내용이 대종을 이룬다.
 
자유로를 타고 가다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적성방향으로 돌아서 약 4Km 정도 달리면 율곡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멀리 감악산에서 이어진 산맥이 파평산을 거쳐 서쪽으로 이어지다가 문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다시 크게 자락을 펼치고 감싸고 있는 이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국을 이루지만 북향이라는 것이 단점이다.
 
자유로에서 율곡리까지 가기 전에 오른쪽 언덕에 화석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오르면 임진강이 보이고 멀리 북서쪽으로는 송악산의 날카로운 연봉이 보인다. 그 부근에 필자가 자주 찾는 봉영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지나는 길에 화석정을 자주 들린다. 그곳에 앉아서 율곡선생님의 격몽요결을 읽다가 같은 이름으로 책을 쓴다면 어떨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선생님에 비할 수 없는 천박한 야인이므로, 왜 때려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에 대해 쓸 것이다. 그 내용을 두 가지만 미리 공개하겠다.
 
▲ 자료이미지. 옛 서당.     © 한국무예신문
옛날 서당의 체벌을 연상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이 목침 위에 올라가 종아리를 맞는 장면이다. 왜 종아리를 때렸을까? 그것도 피가 나도록! 종아리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으므로 때려도 뼈가 다치지는 않는다. 그것이 외형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대단한 생리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종아리에는 오금에서 아킬레스건을 잇는 선의 좌우로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이 지나간다. 12개의 정경맥 가운데 무려 1/3이 통과하는 중요한 부위이다. 다리를 통과하는 경락 가운데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과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 등 나머지 두 개는 앞쪽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종아리와는 관계가 없다. 종아리를 때린 이유는 그 부위를 지나는 4개의 경락을 강하게 자극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4개의 경락은 어린이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비경은 사고력과 집중력 그리고 혈기의 원천이 되는 수곡정미(水穀精米)를 흡수하며, 신경은 생식기능, 면역력, 골수 그리고 신념 또는 의지력과 관련이 있다. 간경은 근육과 용기를 주관하며 방광경은 배설기능과 자연치유력을 주관한다. 종아리를 치면 이 4개의 경락을 강하게 자극하게 된다. 필자의 스승께서는 남자 아이라면 성년이 되기 전까지 적어도 100회 정도는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아야 몸과 마음이 여물게 성장한다고 하셨다. 물론 필자는 이미 성장하여 스승님을 모셨기 때문에 종아리를 맞지는 않았다. 좀 더 일찍 만나서 종아리를 맞았다면 적어도 훌륭한 자식 몇은 더 얻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체벌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종아리 자극요법의 일종임과 동시에 허벅지를 단련하는 일종의 기공체조이다. 하체가 약한 사람은 일부로라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좋다. 두 팔을 높이 드는 것은 기공체조에서 가장 중시하는 동작이다. 다섯 손가락을 붙이고 힘차게 하늘을 향해 높이 뻗으면 팔을 통과하는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 등 여섯 개의 경락이 모두 자극을 받게 된다.
 
게다가 몸의 중심을 통과하는 임맥(任脈)과 독맥(督脈)까지 소통이 되며 옆구리를 통과하는 간경도 자극을 받게 된다. 옛 스승들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체벌을 가할 때에도 신심의 단련을 겸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으니 가히 훌륭한 스승이라 할만하다. 물론 선생의 자질에 대한 문제는 따로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자식이 학교에 가서 선생에게 맞는 것이 싫으면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 헬기 엄마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과잉보호를 하여 기른 자식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될 것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엄하게 길러야 한다는 말의 속뜻을 알게 될 것이다.
 
《주역》의 괘사나 효사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가 있다. 그것이 《주역》을 공부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상구의 효사는 이상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상구효는 건괘에서 설명한 것처럼 항룡유회 즉 현실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은퇴한 사람이나 스스로 뜻이 있어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 또는 현실에서도 출세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학문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상태로 볼 수가 있다. 오로지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는 것이 동몽이다. 티 없이 맑은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동몽의 상태와 같다.
 
공부를 하는 방법도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자료를 통해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선승(禪僧)이나 도인들처럼 우주와 직접 상대하며 통찰과 직관을 통해 진리를 깨듣는다. 그러므로 그 과정은 뼈를 깎는 듯한 노력과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질이 계속되어야 한다. 동몽의 결과는 길하지만, 그 과정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혹독한 채찍질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련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으면 사이비 교주처럼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괴수가 된다. 격몽이라야 도둑놈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도둑놈을 잡는 위대하고 성스러운 인물이 될 수가 있다.
 
몽괘의 괘상은 하부에는 험난함을 상징하는 감괘(坎卦)가 있고, 상부에는 역시 태산준령과 같이 험난한 산을 의미하는 간괘(艮卦)가 가로 막고 있다. 고대에 국경은 물론 각 지방을 분할하는 경계선이 모두 산맥과 하천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그것을 넘어서 왕래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매함이란 험난한 강과 산처럼 인간의 의식이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을 방해한다.
 
몽괘에서 계몽과 교화를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스승은 학생들이 먼저 찾을 정도로 소양과 덕성을 갖추어야 하며, 학생들은 스승을 잘 선택하여 스스로 찾아가 공손하게 배워야 한다. '초서고'처럼 처음에는 잘 가르쳐 주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조금만 어려워도 질문을 하는 녀석에게는 대답을 하지 날아야 한다. 그것이 몽괘에서 주장하는 교육의 원칙이다.
  
초육, 구이, 육삼의 효사에서는 교육방법과 교육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몽매한 상태를 깨우칠 때에는 피교육자가 형벌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가르쳐야 하며, 아이들을 함부로 방치하여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일이 없어야 한다. 부모가 서로 화합하여, 함께 아이들이 잘 모르는 여러 가지 사항들에 관심을 가지고 포용을 하게 되면, 아이들도 부모가 가정을 다스리는 것에 협조를 하게 된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 괘가 결혼에 관한 교육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결혼을 할 때,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가문에 장가를 가거나 시집을 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육사와 육오의 효사는 동등하지 않은 환경에 놓인 아이들은 동등하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아이가 홀로 자라면 주변에 현명한 사람을 만나서 교화되기가 어려우므로 앞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교육을 잘 받을 수가 있으므로 앞날에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후천적 교육에 있어서 좋은 스승을 만나서 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한 것이다. 상구에서는 이러한 후천적 교육을 한 발 더 나아가 설명하고 있으며 적절한 징벌은 교육의 필수적인 요인이지만 선생의 감정이 실린 지나친 체벌은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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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6/20 [09:17]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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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은뜻이다 2017/08/28 [09:15] 수정 | 삭제
  • 종아리맞으며 배우던게 추억이네요.
  • 나영래 2012/06/21 [13:12] 수정 | 삭제
  • 젊은 부모님들께서 이 깊은 뜻을 아셔야 진정 자신의 아이들을 바르게 키울 수가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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