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편집 2024.05.20 [08:37]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섹션이미지
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공지사항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개인보호정책
청소년보호정책
기사제보
HOME > 칼럼 > 무협소설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①
부제: 와룡장호(臥龍藏虎)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史可知 기사입력  2012/08/21 [22:20]
광고

“신비의 섬 여의도(如意島)에 혈풍이 몰아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무림맹을 이끌 맹주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무인들의 혈투!

하지만 강호는 무공만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빼어난 무공만큼이나 변화막측한 모략과 깊은 심계 또한 갖춰야 한다.

청와공주(靑瓦公主), 봉하거사(峰下居士), 금관공자(金冠公子), 백학진인(白鶴眞人) 등 가공할 무위를 지닌 고수들과 신진고수들이 격돌하는 중에 돌연 은둔기인 안수의생(安手醫生)이 나타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형국. 과연 권좌를 차지할 최후의 승자는?”  

- 1997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대권무림(大權武林)’이라는 풍자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천한 수준이지만 나름 역학을 공부한 터라 현 정치권의 판도와 권력의 향방을 풍자한 작품을 써 보았습니다.

각 인물의 사주는 인터넷에 밝혀진 생년월일을 근거로 하였으나, 출생시를 알 수 없는 만큼 사주가 아닌 삼주를 바탕으로, 오행과 용신 위주로 해석을 했습니다. 점성술은 양념 삼아 첨가한 것이고요.

이론상 60년마다 똑같은 사주가 나올 수 있기에, 시대는 360년 전으로 잡았습니다.
오류도 많고 부족한 점도 있겠으나, 그저 심심풀이 파적이라 여기고 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壬辰 盛夏 畵廊那四에서 史可知 拜上
 
서(序)
 
지금으로부터 360년 전, 동방의 빛이라 불리는 유서 깊은 나라 조선의 무림계는  그 어느 때보다 술렁이고 있었다. 무림맹을 이끌 차기 맹주 선출일이 다가온 때문이었다.
 
무림맹은 비록 무인들의 집단이지만 국력의 상징이자 강호 대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닌 단체였다. 그런 단체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지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청운의 뜻을 품은 강호인들은 누구나 한 번쯤 그 자리에 오르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문정파 출신으로서 빼어난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맹주 후보를 선발하는 비무대회에 참가하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그들로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가공할 무위를 지닌 초절정고수들이 버티고 있는 때문이었다.

게다가 강호는 무공만으로 정상에 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공은 기본이고 막측한 심계(心計)와 냉철한 심장을 지녀야 했다.

‘앞에서 찔러 오는 칼은 막을 수 있지만, 뒤에서 쏘는 화살은 피하기 힘들다’는 강호의 무언(武諺: 무림의 속담)도 있지 않은가.

강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무림맹은 겉으로 보면 의리와 명예를 중시하는 무인들의 집단이지만, 구성원들도 사람인지라 출세를 노리는 자도 있었고, 황금을 쫓는 이도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명예나 이해에 얽매여 끊임없는 암투가 벌이지다 보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원수와 손을 잡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왕왕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탄생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신비의 조직 무림맹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놀랍게도 무림맹은 무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문신인 율곡(栗谷)의 의지로 탄생한 조직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고고학자가 이름 모를 탑(塔)에 숨겨진 문서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기에 ‘탑시크릿’이라 불리기도 했다.
 
선조 25년인 임진년, 왜는 중국을 정벌하겠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 7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나라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후유증은 컸다.

‘모든 것은 국력이 약한 때문이야. 우리도 강한 군사를 길러야 해.’

임진왜란 전에 이미 왜의 침입을 예상하고 십만양병설까지 주장했던 율곡 이이(李珥)는 국력의 강성만이 살 길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전국 팔도에 흩어져 있는 무인들을 규합하는 한편 비밀리에 서해의 작은 섬을 매입했다.

“이곳에서는 내 뜻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을 거야. 그래,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여의도(如意島)라 부르면 좋겠군.”

이렇게 이름 지어진 섬에 엄선한 정예 무인들을 모아 ‘구쾌’라는 조직을 만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구쾌(救快)란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재빨리[快] 구할[救] 수 있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과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에서도 충분히 느꼈듯이 힘은 곧 국력이오. 여러분들은  최강의 무인이 되도록 훈련에 매진하시오.”

‘여의도 구쾌’라고 명명된 무인들의 집단은 가공할 무공을 개발하고 수련에 박차를 가해 엄청난 힘을 지닌 거대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여의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지자 상인들이 모여들어 무림맹 인근에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들이 번성하여 무림맹이 위치한 여의도는 한 나라와 맞먹는 힘과 금력을 쥐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물도 고이면 썩는 법. 정신적 지주인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된 무인들의 집단은 명칭을 ‘무림맹’이라 바꾸고 멋대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인근 동네에 가서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것은 애교에 속했다. 관리들과 결탁하여 구휼미를 빼돌리는가 하면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심지어는 매관매직(賣官賣職)까지 하는 등 온갖 비리에 관여한 것이다.   

조직이 커진 만큼 내부의 진통도 따랐다. 무림맹은 겉으로는 하나인 듯 보였지만  구성원들의 출신이 다르다 보니 서로 견제하고 다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무인끼리 내부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그들 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무림맹의 주 세력을 이루는 큰 단체로는 세 곳을 꼽을 수 있다. 우선 9대인 현 맹주를 배출한 거대 문파로 한[一] 나라[國]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는 일국파(一國派)가 있고, 그보다는 약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단체로 백성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기치를 건 민초파(民草派), 그리고 재야 은둔고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여 진실은 통한다고 나선 진통파(眞通派)가 있다.

어느 파 출신이 무림맹주가 되느냐에 따라 문파의 위상 또한 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일. 각 문파는 서로 맹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추대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잘 되면 충신이요 못 되면 역적’이라는 말처럼 문파의 존폐까지 걸고서. 

하긴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은 과거에나 통용되던 말, 요즘은 이겨야 정의라고 하지 않던가.  
 
이미 세력을 잃은 현 무림맹주 서면검수(鼠面劍手)는 화려한 등장과는 달리 쓸쓸한 퇴장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내곡(內谷)에서 익힌 비밀스럽기 그지없는 비비검법(秘秘劍法)으로 모든 상대를 물리치고 맹주 직에 올랐다. 집권 초기부터 청렴과 정의를 내세웠지만, 정작 본인에 대한 의혹도 적지 않았고, 최근 들어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했음이 밝혀져 동창(東廠)과 금의위(錦衣衛)의 내사를 받고 있는 때문이었다.

이 같은 혼란기에 대망을 품은 잠룡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림맹주라는 권좌를 노리고서.
 
비무 규정을 바꾸자고? 
 
▲ 무협 관련 이미지(출처:Daum) 
무림맹의 실세인 신세파(新世派) 집무실에는 장로들과 맹주 후보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본래 그들은 현 맹주와 같은 일국파(一國派) 소속이었다. 한[一] 나라[國]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현 맹주의 실정과 측근들의 비리로 강호인들의 질타를 받게 되자 새로운[新] 누리[世]를 만들겠다는 의념을 담아 문파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 바꿨다고 내용까지 바뀔 수는 없었다. 요직의 인물들은 바뀌지 않았고, 쇄신한다고 내건 기치 또한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알 만한 사람은 코웃음을 칠 밖에.

신세파의 실질적 수장이 된 청와공주(靑瓦公主)는 과거 일국파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고, 나름 강경책을 펴서 가장 막강한 차기 무림맹주 후보로 급부상했다.

그렇지만 어느 곳에나 반대하는 인물은 있는 법. 노회한데다가 세력까지 갖춘 장로들이 딴죽을 걸고 나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과거 일국파 시절 현 맹주인 사면검수를 보좌하던 특임장로와 각법의 달인 족구대제 그리고 꼿꼿한 기개의 경기지사 등 삼 인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비무 규정이 청와공주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규정을 받아들일 수 없소. 경선 방식을 바꿔야 하오.”
청와공주는 발끈하여 반론을 폈다. 

“안 되오. 아무리 예선전이라도 참가자들이 대회 규정에 맞춰야지. 참가자에게 맞춰 그때마다 규정을 바꾼다는 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림  출신은 권으로 겨루자 할 것이고, 무당과 화산은 검을 들고 나올 것이며, 개방은 봉술만 사용하자고 하지 않겠소?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들 하시오.” 

비무대회 참가를 노리는 장로들과 회의를 마치고 나온 청와공주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과거 일국파 시절, 무림맹주 선출을 두고 쓰라린 패배를 한 기억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부친을 잃은 지 어언 30년. 그 동안 대권을 잡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얼마나 칼을 갈고 닦았던가.

김유신 장군이 남긴 검보를 입수하여 선친이 발전시킨 유신검법, 너무도 위력이 강해서 무림에서 사라져야 할 무공이라는 질타를 받으면서도 끝끝내 지켜 온 가전비기(家傳秘技)를 십성에 이르도록 연마하지 않았는가.

이제 누구든 일초에 꺾을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5년 전 맹주 후보 선발에서 초식이랄 수도 없는 얄팍한 꼼수에 당하고 말았으니 너무 창피해서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본래 맹주가 되기 위한 비무대회에 참가할 후보 선출은 장로단의 결정에 따르기로 되어 있었다. 내공의 순후함과 초식의 정교함을 파악하려면 그 만한 정도의 시각과 내공을 갖춘 인물이라야 가능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진고수인 서면검수(鼠面劍手)가 일반 문도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본래 무예계 출신도 아니요, 상인으로 떠돌던 그가 갑자기 관계에 들어와 운 좋게 도읍 수이(首爾, Seoul)의 판윤(判尹)이 되더니 청계하(淸溪河)를 무대로 날뛰는 수적들을 소탕하여 이름을 얻었다.

따지고 보면 수적이라야 별 것도 아니었다. 변변한 무공도 갖추지 못한 무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무림맹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몇 차례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어찌어찌 하여 무림맹주 선출을 위한 비무대회 후보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갑자기 터무니없는 시비를 걸어오니 청와공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장로들은 나이가 너무 들었소. 전통도 좋지만 시대는 바뀌었소. 이제 미래니엄(未來你掩: 미래는 네가 가리어 덮을 것이다) 시대라 하지 않소? 장로들만이 아니라 일반 문도(門徒)들의 의견도 중시해야 한다고 보오. 그러니 모두의 의견을 들어 비무대회에 출전할 대표를 선발하도록 합시다.”

서면검수(鼠面劍手)가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우며 압박해 왔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강호 경력을 따지자면 신인에 불과한 그의 행위는 명백한 도전이었다. 자신이 무림맹주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백일하에 드러낸 도전.

처음에는 기가 막혔다. 옛날 같으면 귀족 중의 귀족, 신라시대라면 진골(眞骨)인 자신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처지였으리라.

‘그래, 세상 좋아졌다. 옛날 같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것들이 날뛰고…….’

근본도 없는 족속과 칼을 맞대는 것도 수치요, 그의 도전을 피하는 것은 더욱 수치라 여겨 마지못해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장로단은 청와공주를 지지했지만, 일반 문도들은 서면검수를 지지한 것이다. 합산 결과, 다수의 지지를 얻은 서면검수가 비무대회 출전자로 결정되었다.

잘 나가다가 막판에 자뻑을 하여 피박을 쓴 것이나 다름없게 된 청와공주로서는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정당한 비무를 하여 패했다면 ‘정의는 칼로 말하는 법’이라는 강호의 불문율에 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가 출신도 아닌 이가 운 좋게 어디서 비급 한 권-그것도 값을 후려 쳐서 산 것일지도 모르는-얻어 익힌 얄팍한 수법에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강 건너 간 배요 떠나간 막차가 된 것이다. 결국 청와공주는 칼을 뽑아 휘두르기는커녕 비무대에 오르지도 못하고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해. 절치부심(切齒腐心), 다시 이를 악다물고 무예 연마에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분을 삭여야 했다.

물론 맹주가 된 서면검수가 겉치레로나마 장로라는 직책을 주었고, 그녀 역시 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다. 차기 맹주로서 초석을 다지기 위한 행보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노회한 측근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한때는 위기도 있었다. 한밭[大田]을 방문했을 때였다. 문도들을 모아 놓고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살수(殺手)가 나타나 습격을 한 것이다. 다행히 가벼운 자상(刺傷)을 입는 것으로 그쳤지만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병신 같은 보표(保鏢) 자식들. 그토록 많은 녹봉을 받아 챙기면서 일개 미치광이의 공격조차 막지 못하다니!’

강시투표(殭屍投票)
 
무림맹의 다른 세력이랄 수 있는 야합(野合)의 조직원들 또한 나름대로 분주했다. 도무지 청와공주에게 맞설 만한 인재가 없는 때문이었다. 더욱이 야합의 하나인 진통파 문도들 간에는 싸움이 일어나 도무지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무대회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진통파 태상장로로 차기 맹주 후보였던 북향여인(狄道旅人)의 욕심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관악산에 자리한 명문 수이파(首爾派) 출신으로 적(狄), 즉 북쪽 지방을 떠도는  나그네이고 싶다는 열망을 담은 별호를 가진 북향여인이 무리수를 둔 것이다. 
  
진통파 역시 비무대회 참가자 선출은 투표로 이뤄진다. 그러나 신세파와는 달리 장로를 비롯하여 일반 문도 그리고 인근에 사는 백성들의 의견까지 묻는다는 것이 달랐다. 선택의 폭을 넓히고, 보다 많은 이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북향여인과 그의 측근들이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을 늘리고자 소혼술을 이용하여 강시(殭屍)까지 동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강시란 이미 생명을 잃어 뻣뻣하게 된 시신을 가리킨다. 강시를 운용하는 수법은 본래 마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무림맹이 이를 연구하여 한층 발전시켰다.

무림 평화를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한 무인들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도록 조치한 다음 유사시에 활동할 수 있도록 비밀병기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까지 동원하여 투표를 하도록 했으니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강시는 생명과 사고력이 없으니 자격이 없다는 측이 있는가 하면, 무림 평화를 위해 피를 흘린 이들이니 자격이 있다는 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두 번째 거대 세력인 민초파 역시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몇 후보가 있긴 하지만 청와공주에 맞서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이 세평이었고, 그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대맹주였던 봉하대제(峰下大帝)를 보필하며 무림맹 서기를 지낸 봉하거사(峰下居士)를 후보로 내세운다는 데 좌중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대군의 직전제자로서 언제나 금관을 쓰고 다니는 금관공자(金冠公子)가 암마(暗馬, Dark Horse)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아주 작은 마을의 아전이었다가 봉하대제의 눈에 들어 관계로 발탁, 현재는 남방지역을 다스리고 있으나 스승의 유지를 받들겠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무림맹주에 도전코자 출사표를 던졌다고 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법. 과연 소호(少虎)냐 노호(老虎)냐? 좌중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 다음에 계속 -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기사입력: 2012/08/21 [22:20]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⑧ 대권주자와 싸이 '강남스타일' 史可知 2012/10/03/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⑦ 안수의생 드디어… 史可知 2012/09/22/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⑥ 史可知 2012/09/17/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⑤ 史可知 2012/09/07/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④ 史可知 2012/09/02/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③ 史可知 2012/08/30/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② 史可知 2012/08/24/
[대권무림 II] [2012 무협] 대권강호(大權江湖)① 史可知 2012/08/21/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개인보호정책청소년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