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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존왕양이(尊王攘夷)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09/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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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역사학자)     ©한국무예신문
BC 681년, 제가 노를 격파했다. 노장공(魯莊公)이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제환공(齊桓公)도 수락했다. 양국 군주가 회맹을 체결했다. 노장공이 서약서를 읽으려고 할 때 조말(曹沫)이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하면서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승낙하자 조말은 비수를 거두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신뢰를 잃지 말라고 말렸다.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를 믿고 패주로 받들었다. 환공 23년, 산융(山戎)의 침공을 받은 연을 구하러 갔다가 철수했다. 연장공(燕庄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의 국경을 넘었다. 환공이 말했다.

“천자를 제외하고는 제후들끼리 국경을 넘어서 배웅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연나라에 대해 예의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환공은 도랑을 파서 양국의 경계로 삼고 연장공이 지나온 땅을 그에게 주었다. 제후들은 모두 제에 귀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공은 간통으로 노에서 정변을 일으킨 누이를 소환해 죽이기도 했다.

환공 35년 여름, 천하의 제후들과 회맹을 개최하자 종주국 주양왕(周襄王)은 문왕과 무왕이 제사에 사용했던 기물을 보내고 환공에게 엎드려 절을 하지 말라고 명했다. 환공은 수락하려고 하다가 관중이 반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BC 771년에 주평왕(周平王)은 수도를 하남성 낙양으로 옮겼다. 이를 계기로 예악을 앞세워 제후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겸병전쟁이 시작됐다.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오패(五覇)’라는 실력자들이 잇달아 등장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제환공이다.
 
환공이 패주가 된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왕’이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였다. 존왕이란 주왕과 주례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시대는 예악이 붕괴되고 천하의 주인이던 천자의 정치적 지위와 권세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관중은 추락한 천자의 권위를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환공은 초성왕이 주왕실의 제사에 사용할 포모를 바치지 않았다고 군대를 동원해 초를 쳐서 사죄를 받아냈다. 주왕실의 위신을 지키고, 무너진 주례의 중요성을 바로잡은 것은 환공의 공이다.
 
관중의 계획과 리더에 따라서 제환공은 곳곳에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례를 준수하도록 강압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천하의 제후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형식적이었지만 주왕실의 지지와 제후들에게 신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양이’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중원을 지킨다는 정치적 구호이다. 주왕실이 약화되고 천하에 대란이 발발하자 중원의 도처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원을 둘러싸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내지로 침투해 중국인이 살던 곳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았다.
 
중원에서 이민족의 세력이 확대되자 국력이 약한 제후국들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환공은 먼저 제후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그들과 연합해 연을 침공한 이족을 몰아냈으며, 위(衛)와 형(邢)을 도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환공의 도움으로 이들 제후국은 사직과 국토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중국민족의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민족으로부터 중국인들의 터전을 지켰기 때문에, 100년 후의 공자로부터 “관중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사실상 ‘존왕양이’란 주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현실을 인식한 환공과 관중의 패권전략이었을 뿐이지만, 정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룩한 성공이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다지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꿈을 성취하려면 정의를 지킨다는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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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9/07 [16:10]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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